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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81.09.14 노동하는 인간(Laborem Exercens) (0)
작성자 : 복음화위원회
등록일 : 2008.03.01 10:44
조회수 : 1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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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새로운 사태」 반포 90주년을 맞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반포하신 인간 노동에 관한 회칙이다. 세계적인 불평등과 불의에 맞서는 정의 구현의 임무가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대두되는 오늘날, 빈번하게 발생하는 인간 노동에 관한 문제를 강조하고, 인간의 노동은 인간의 선이라는 관점에서, 사회 문제 전체에 대한 ‘본질적인 핵심’이고 근본적이고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띤다는 점을 역설한다.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90주년을 맞이하여, 인간 노동에 관하여

노동하는 인간

LABOREM EXERCENS

1981. 9. 14.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90주년을 맞이하여
인간 노동에 관하여
존경하는 형제 주교들에게, 사제들과 수도자 가족들에게
교회의 자녀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회칙

범선배 신부 번역


차 례

I. 서 론
1. [새로운 사태] 반포 90주년을 맞는 오늘날의 인간 노동
2. 교회의 사회 활동과 사회 교리의 유기적인 발전에 관해서
3. 노동 문제는 사회 문제의 관건

II. 노동과 인간
4. 창세기에 나타난 노동
5. 객관적 의미의 노동:기술
6. 주관적 의미의 노동:노동의 주체인 인간
7. 가치 전도의 위협
8. 노동자들의 결속
9. 노동과 인간의 존엄성
10. 노동과 사회:가정과 국가

III. 역사의 현단계에서 본 노동과 자본의 투쟁
11. 투쟁의 차원
12. 노동의 우위성
13. 경제주의와 물질주의
14. 노동과 소유
15. ''인격주의’ 논거

IV. 노동자의 권리
16. 인권의 광범위한 맥락 안에서
17. 직접 고용주와 간접 고용주
18. 고용 문제
19. 임금과 기타 사회적 혜택
20. 노동 조합의 중요성
21. 농업 노동의 존엄성
22. 장애인과 노동
23. 노동과 이민 문제

V. 노동의 영성
24. 교회의 특별한 임무
25. 창조주의 활동에 참여하는 노동
26. 노동하는 인간, 그리스도
27.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비추어본 인간의 노동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인사와 더불어 사도적 축복을 보낸다.


노동을 하여(Laborem Exercens) 인간은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얻어야 하고1) 과학과 기술의 끊임없는 진보에 이바지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한 가족인 형제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회의 문화적, 도덕적 수준을 끊임없이 들어높이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노동이란 그 성격이나 환경이 어떻든간에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어떤 행위를 뜻한다. 즉, 인간성 자체로 인하여 그리고 본성으로 타고나 인간이 할 수 있는 수많은 행위들 가운데 노동으로 인식될 수 있고 또 인식되어야 하는 인간의 어떤 활동을 뜻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볼 수 있는 우주 안에 창조되었으며,2) 땅을 다스리도록 그 안에 안배되었다.3) 그래서 태초부터 인간은 노동을 하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인간을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노동이다. 다른 피조물들이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행동은 노동이라고 할 수 없다. 오직 인간만이 노동을 할 능력이 있으며, 오직 인간만이 노동을 하며, 동시에 노동을 통하여 자신의 지상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은 인간과 인간성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시이며, 인격체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 움직이는 개개의 인격체를 나타내는 표시이다. 그리고 이 표시는 인간의 내면적 특성을 결정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본질 자체를 형성한다.



I. 서 론

[새로운 사태] 반포 90주년을 맞는 오늘날의 인간 노동

1. 1981년 5월 15일은 위대한 교황 레오 13세의 사회 문제에 관한 회칙, 즉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라는 말로 시작되는, 극히 중대한 회칙이 반포된 지 90주년이 되는 기념일이었다. 이날을 기념하여, 본인은 이 문헌을 인간의 노동에, 나아가 광범위한 노동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바치고자 한다. 로마 성 베드로좌에서 본인의 봉사직을 시작하며 펴낸 회칙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헤아릴 수 없는 구원의 신비 때문에 인간은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하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이다.”4) 그래서 이 길로 끊임없이 돌아와야 하며, 다양한 양상들 속에서 항상 새롭게 그 길을 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양상들 속에서 그 길은 모든 부와 동시에 지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든 노고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노동은 이러한 양상들 가운데 하나로, 항구하고 근본적인 것이며, 항상 적절한 것으로서 새로운 관심과 결정적인 증거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다. 새로운 질문들과 문제들이 늘 솟아나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희망이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인간 실존의 기본 영역에 따르는 새로운 두려움과 위협도 있다. 인간의 생활은 매일 노동으로 이루어지며, 노동에서 인간은 그 독특한 존엄성을 얻는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은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의 노고와 고통을 동반하고, 또한 개별 국가와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생활 속에 깊이 침투해 들어오는 해악과 불의도 안고 있다. 제 손으로 일하여 얻은 빵을 먹는다5)는 것도 진리이지만 - 이 말은 육신 생활을 영위시켜 주는 일용할 양식뿐 아니라 과학과 발전, 문명과 문화의 양식도 뜻한다 - “이마에 땀을 흘려”6) 얻은 이 빵을 먹는다는 것도 영원한 진리이다. 말하자면 개인적인 노력과 노고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각 사회와 또한 전인류의 생활을 어지럽게 하는 긴장과 충돌 그리고 위기들 속에서 얻는 빵을 먹는다는 말이다.
기술, 경제, 정치적 여건에서 새로운 발전이 일고 있는 이즈음, 우리는 맛새로운 사태맜 반포 90주년을 경축하고 있다. 이 새로운 발전은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는 대로 지난 세기의 산업 혁명 못지 않게 노동계와 생산계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일반적인 특성으로 볼 때 많은 요인들이 있다. 여러 생산 분야에 점증적으로 도입되는 자동화, 에너지 및 원자재 가격 상승, 천연 자원의 고갈과 심각한 오염 현실의 증대, 수세기 동안 남에게 예속되어 왔던 민족들이 국가들 사이에서 그리고 국제 협상에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정치적 부상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과 요구들은 현대의 경제 구조 및 노동 분배 구조를 재정립하게 하고 재조정하게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변화는 수많은 숙련공들에게 실직을 안겨줄지도 모르고, 비록 일시적이나마 재훈련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변화가 더욱 발전된 국가들의 물질적인 풍요를 저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원인이 될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가난 속에서 수모를 겪으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안겨줄 수도 있다.
이러한 변화가 인간 사회에 끼칠지도 모르는 결과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교회의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존엄성과 권리를 천명하고 그러한 존엄성과 권리가 침해되는 상황들을 고발하여, 위에 언급한 변화들을 이끌어 인간과 사회의 참된 진보를 보장하는 것이 자신의 직무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사회 활동과 사회 교리의 유기적인 발전에 관해서

2. 인간에 관한 문제인 노동은 확실히 ‘사회 문제’의 핵심을 이룬다. 위에서 말한 맛새로운 사태맜가 반포된 이래 거의 백년 간, 교회의 사도적 사명에 관련된 가르침과 많은 시도들이 특히 이 사회 문제를 향해왔다. 노동에 관한 이 회칙도 다른 노선을 따르겠다는 의도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가르침과 활동에 대한 교회의 모든 전통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반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시에 본인은 복음의 보고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기”7) 위하여 복음의 규범에 따라 노동에 관한 반성을 하고 있다. 인간이나 인간의 지상 생활이 옛 것이듯 확실히 노동은 옛 것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 문화, 문명 등의 그 다양한 양상들 속에서 연구 분석된 현대 세계의 전체적인 인간 상황은 인간의 노동에 관한 새로운 의미들을 찾아낼 것을 요구한다. 달리 말해서 이 분야에서 개인과 가정, 각 국가와 온 인류, 마침내는 교회 자신이 당면한 새로운 과제의 형성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맛새로운 사태맜 반포 이래 사회 문제는 끊임없이 교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한 증거로는 역대 교황들의 많은 교서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여러 문헌들, 각국 주교단의 성명서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국제적인 차원이나 지역 교회의 차원에서 정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교황청의 주도하에 있는 여러 기구들의 활동들을 들 수 있다.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문제에 관해 표명한 모든 선언들과 그 투신은 여기서 상세하게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많다. 이 분야의 모든 일을 조정하는 기구인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Pontificia Commissio a Justitia et Pace)가 공의회의 결과로서 발족되었는데 각국의 주교회의는 이에 부응하는 기구들을 갖추고 있다. 이 기구의 이름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사회 문제가 전체적이고도 통괄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세계에서 정의에 대한 투신은 평화에 대한 투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이중의 투신은 지난 90년 동안 많은 유럽 국가들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다른 대륙의 국가들을 괴롭힌 양차 대전에서 얻은 쓰라린 체험으로 확실히 뒷받침되고 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점증하는 핵전쟁에 대한 공포와 그로 말미암아 무시무시한 자기 파멸에 대한 전망은 이 이중의 투신을 뒷받침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최상 교도권으로 반포한 문헌들이 발전되어 온 주요 노선을 살펴본다면 바로 이러한 문제에 관한 언명들이 그 안에 명백히 천명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세계의 평화에 관한 문제라면 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에 그 주요 핵심이 있다. 누구든 사회 정의 문제에 대한 발전상을 연구하려면 다음 두 가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첫 시기는 회칙 [새로운 사태]가 반포된 때부터 비오 11세의 회칙 [사십주년] (Quadragesimo Anno)가 반포될 때까지로, 이 시기의 교회의 가르침은 ‘노동자 문제’를 각 국가들 내에서 해결하도록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 다음 시대에는 같은 가르침이 그 지평을 더 넓혀 ‘노동자 문제’가 전세계 안에서 다루어지도록 한 것이다. 빈부의 불균형한 분배, 발전된 국가와 대륙 그렇지 못한 국가와 대륙 간의 차이는 평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모두에게 정당한 발전이 보장되도록 그 방법을 찾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요한 23세의 회칙 [어머니요 스승](Mater et Magistra),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그리고 바오로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등에 나타나는 가르침의 골자이다.
이와 같이 사회 문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과 임무가 발전되어 온 추세를 살펴보면 사태의 상황을 매우 적절하게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계급 문제가 사회 문제의 핵심으로 특히 부각되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세계 문제로 그 강조점이 바뀌었다. 그래서 이제는 계급에 관한 것만이 주의를 끄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불평등과 불의에 관한 것들이 주의를 끌게 되었다. 그 결과 계급 문제뿐 아니라 현대 세계에서 정의를 구현시키기 위해 이행해야 할 임무에 관한 문제가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대두되게 되었다. 현대 세계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철저한 분석은 사회의 불의에 대한 종전의 분석 의미를 더욱 심원하고 더욱 충만하게 드러낸다. 지상에 정의를 구현시키도록 노력하는 일이 오늘에 주어진 과제라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불의한 구조들을 감출 것이 아니라 더욱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검토하여 변혁시키는 일이 요청된다.

노동 문제는 사회 문제의 관건

3. 사회의 객관적인 현실을 진단하든지 복잡 다단한 사회 문제의 영역에서 교회가 그 가르침을 펴든지 이러한 모든 과정들 속에서 인간의 노동에 관한 문제는 자연히 빈번하게 대두된다. 이 문제는 사회 생활에서도 교회의 가르침에서도 이제는 불변의 요소가 되었다. 더욱이 교회의 이러한 가르침 속에 노동 문제가 언급된 것은 훨씬 오래된 일로 최근 90년 동안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실상 교회의 사회 교리는 그 근원을 성서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특히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간에 두고 있다. 처음부터 사회 문제는 교회의 가르침에 속해 있었다. 교회는 사회 속에서 인간과 생명을 인식했으며 특히 각기 그 시대의 필요에 따라 사회 윤리를 다루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유산은 맛새로운 사태」를 필두로 하여 현대의 ‘사회 문제’에 관한 교황들의 가르침에 의해 상속되고 발전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노동 문제에 관한 연구는 영원하다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진리가 유지되는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이루어져 온 것이다.
본 회칙에서 이 문제에 관해 다시 한번 거론하는 것은 - 어쨌든 이 문제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다룰 뜻은 없다 - 교회가 이미 가르쳐온 것을 단지 총정리하고 반복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쩌면 전보다 더 이 문제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 문제를 인간의 선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때, 인간의 노동은 사회 문제 전체에 대한 관건, 아니 어쩌면 본질적인 핵심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발생하고 날로 복잡해지는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 또는 점진적인 해결책을 “인간의 생활을 더욱 인간답게 만든다”8)는 명제 아래 찾아야 한다면 그 핵심인 인간의 노동은 근본적이고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띠게 된다.



II. 노동과 인간

창세기에 나타난 노동

4. 노동은 인간의 지상 실존에 있어 근본적인 영역이라고 교회는 확신한다. 인간에게 공헌해 온 많은 학문의 온갖 유산들을 보아서도 교회는 이러한 확신을 더욱 굳힌다. 인간학, 고생물학,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등 많은 학문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고 본다. 교회의 이러한 확신의 원천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성의 확신인 동시에 신앙의 확신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 여기서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 교회가 인간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고 인간에게 자신을 표현하는데, 단지 역사적 체험에 비추어서만도 아니고, 다양한 학문적 인식 방법의 도움을 받아서만도 아니며, 무엇보다도 살아계신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교회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표현할 때,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는 창조주요 구세주인 살아계신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과 탁월한 섭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는 노동이 인간의 지상 실존에 있어 근본적인 차원이라고 확신하는 근거를 창세기의 맨 첫 장에서 발견한다. 때로는 그 표현 방법이 진부하기는 해도 이 대목을 분석해 보면 바로 창조의 신비를 서술하는 맥락 속에 인간에 대한 근본 진리들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진리들은 맨 처음부터 인간에게 결정적인 것이며, 동시에 원초적인 정의로운 상태에서나 인간과 맺은 하느님의 원초적인 창조 계약이 범죄로 인해 파기된 후에나 이러한 진리들은 인간의 지상 실존에 중요한 선을 긋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 남자와 여자로”9) 창조된 인간이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10)는 말을 듣는데, 이 말들은 노동에 관해 직접적으로 분명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세상에서 인간이 수행할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간접적으로 지적한다. 참으로 이 말들은 극히 심오한 깊은 노동의 본질을 드러낸다. 적어도 자신의 창조주로부터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다. 이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인간은, 모든 인간 존재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의 행위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다.
‘타동’ 활동, 즉 주체인 인간에 의해 시작되어 외적인 객체를 지향하는 행위로 파악되는 노동은 ‘땅’에 대한 인간의 특별한 지배를 전제로 하며 동시에 이 지배를 확인하고 발전시킨다. 성서에 나오는 ‘땅’이란 단어는 우선 인간이 거주하는 볼 수 있는 우주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분명히 이해된다. 그러나 넓은 뜻으로 볼 때 이 단어는 인간이 영향력을 발휘하며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세상 전체를 내포할 수도 있다. “땅을 다스리라”는 표현은 무한한 영역을 가리킨다. 그 표현은 땅(간접적으로는 볼 수 있는 세상)에 있는 모든 자원들, 즉 일시적인 활동을 통해 인간이 찾아내 그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서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 말들은 변함없이 적절한 것이다. 이 말들은 과거의 문명과 경제뿐 아니라 현대의 현실 전체 그리고 미래에 펼쳐질 발전의 양상까지를 다 포용한다. 이 미래에 펼쳐질 발전의 양상이란 어느 정도는 이미 암시되고 있지만 대부분은 인간에게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고 숨겨져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때때로 인류 또는 각 국가들의 경제 생활과 문명화에 관하여 ‘가속화’의 시기라고 말하는데, 과학과 기술의 발전, 특히 사회 경제 생활을 위한 결정적인 발명들과 연결시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가속화’ 현상들은 아주 오래된 성서 텍스트가 말하는 본질적인 내용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점점 더 땅의 주인이 되며 또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볼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굳혀가지만, 인간은 이러한 과정이 어떠한 경우에나 어떠한 단계에서 이루어지든 창조주의 원초적인 명령 안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령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필수 불가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동시에 이러한 과정은 보편적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 존재를 포용하고, 모든 세대, 모든 양상의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발전을 포용한다. 동시에 그것은 개개의 인간 존재 안에, 개개의 의식적인 인간 주체 안에 일어나는 과정이다. 동시에 모든 개인은 거기에 포용된다. 개개인 각자는 모두 합당한 영역에서, 또 셀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땅을 다스리는’ 인간으로서 그 거대한 과정에 참여한다.

객관적 의미의 노동: 기술

5. ''땅을 다스리는’과정에 대한 이러한 보편성과 동시에 다양성은 인간의 노동을 조명한다. 땅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노동으로, 노동에 의해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객관적 의미로서의 노동이 부각되는데 그 표현은 여러 세기의 문화와 문명에서 발견된다. 동물들을 순화시키고 사육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음식과 옷을 얻으며, 땅과 바다에서 여러 가지 천연 자원을 얻는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인간은 땅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땅을 경작하기 시작하여 거기서 얻은 것을 자신의 용도에 맞게 변형시킬 때 비로소 본래 의미의 ‘땅을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농업은 인간의 노동을 통해, 경제 활동의 첫번째 장이 되며, 생산의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한편 공업은 천연 자원이든 농산물이든 또는 광산품이든 화학 원료이든 간에 지상의 부를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인간의 노동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항상 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이른바 서비스 산업 분야나 순수 이론적이거나 응용적인 연구 분야에 있어서도 옳은 이야기다.
공업과 농업에서 인간이 하는 일은 이제 대부분이 수동적인 일이 아니다. 인간의 손과 근육의 노고를 덜기 위해 점점 더 완벽하게 기계화되기 때문이다. 공업뿐 아니라 농업에서도 점차 발전하는 과학과 기술이 이루어놓은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산업 시대’의 시초부터 최근의 전자 기술이나 정밀 공업 기술과 같은 새로운 기술들을 통해 계속 이루어진 발전 양상까지를 통틀어 볼 때 이러한 사실은 문명화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산업 과정에서 마치 기계가 ‘일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인간은 단지 기계를 관리하고 작동시키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계를 유지시켜 나가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산업적인 발전이 새로운 양상으로 인간의 노동에 대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터전이 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른바 노동자 문제를 야기한 최초의 산업화나 그 뒤를 이은 산업 시대와 후기 산업 시대의 변혁은 ‘노동’이 더욱더 기계화된 시대에도 노동의 합당한 주체는 언제나 인간이란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산업 및 그와 관련된 분야인 현대의 전자 기술, 특히 소형화 작업과 관련하여 통신 및 원거리 통신 기술 등의 발전은 인간의 지성에서 나오는 노동의 협조자로서의 기술이 노동의 주체와 (넓은 의미의) 객체 사이의 상호 작용에서 얼마나 막중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기술을 노동의 가능성이나 유용성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노동에서 사용하는 도구들의 총체로 본다면, 기술은 의심없이 인간의 협조자이다. 기술은 인간의 노동을 수월케 하고 완전케 하며 신속하게 하고 증대시킨다. 기술은 과학 발달을 촉진시켜서 노동 생산의 양을 증가시키고 그 질도 향상시킨다. 그러나 예컨대, 노동의 기계화가 인간을 ‘밀어내고’ 개인의 모든 만족감이나 창의력이나 책임감을 빼앗아버리거나, 많은 노동자들의 직업을 빼앗아버린다면, 또는 기계에 대한 과신으로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전락시킨다면, 기술은 인간의 협조자가 아니라 그의 적이나 다름이 없을 수도 있다.
맨 처음부터 인간에게 “땅을 다스리라”고 한 성서의 말씀을 산업 시대와 후기 산업 시대를 포함한 현대 전반에 걸친 맥락에서 알아듣는다면, 그 말씀은 또한 의심없이 기술과 관련을 맺으며, 인간의 재능으로 이루어진 노동의 산물이요 인간의 자연 정복에 대한 역사적 확신이기도 한 기계화된 세상과 관련을 맺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현대는, 특히 하나의 사회라는 의미의 현대는 기술을 경제 발전에 작용하는 주요인으로 당연히 평가한다. 그러나 동시에 기술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는 바로 인간이 그 주체라는 점에서, 인간의 노동과 관련된 본질적인 문제들이 따라다녔고 지금도 항상 따라다닌다. 이 문제들은 특히 윤리적이고 윤리 사회적인 특성의 내용과 긴장을 안고 있다. 그래서 이 문제들은 수많은 종류의 기구들, 국가들과 정부들, 그리고 체제들과 국제 기구들에게 끊임없이 도전하며, 또한 교회에까지 도전한다.

주관적 의미의 노동: 노동의 주체인 인간

6. 땅을 다스리는 일이 인간의 의무라는 성서의 말씀과 관련 있는 노동에 대한 고찰을 계속하기 위해 우리는 객관적 의미에 기울였던 것보다도 주관적 의미의 노동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동안 우리는 다방면에서 자신의 전공에 따라 학문을 하는 학자들과 노동에 전념하는 사람들에게 밀접하고 상세하게 알려진 광범위한 문제들만을 겨우 다루어왔을 뿐이다. 이 분석에서 우리가 언급하는 창세기의 구절이 객관적 의미의 노동에 대해 간접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또한 주관적 의미의 노동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절은 매우 설득력이 있으며 또한 중대한 의미를 가득 지니고 있다.
인간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서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천부적인 이성적 방법으로 행동할 수 있고 또 자신에 대해 결정을 할 수 있으며 자기 완성을 위해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이므로, 인간은 노동의 주체가 된다.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인간은 일을 하고 노동 과정에 속하는 다양한 활동들을 수행한다. 이러한 활동들은 그 객관적인 내용과는 별도로 인간의 인간성을 구현시키고, 바로 그 인간성 때문에 인간에게만 고유한 인격체로서의 소명을 완수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이 주제와 관련된 중요한 진리들은 최근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특히 인간의 소명을 다루는 제1장 - 에서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고찰하는 성서 문맥의 이 ‘다스림’이란 말은 노동의 객관적인 면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노동의 주관적인 면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인간과 인류가 땅을 다스리는 과정으로 이해되는 노동은, 그 과정을 통하여 인간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다스리는 유일한 자로 확신할 때라야 비로소 성서의 이 근본 개념과 부합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 다스림은 객관적인 차원보다는 주관적인 차원에 더 관계되며, 이 차원은 노동의 윤리적 본질 자체를 결정한다. 인간의 노동이 고유한 윤리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의심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윤리적 가치를 성취하는 것이 인격체이며, 의식적이며 자유로운 주체, 즉 자신에 대해 결정하는 주체라는 사실과 명백하게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노동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근본적이고 영원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진리는 모든 시대를 특징짓는 중대한 사회 문제들을 규정하는 데 있어 일차적인 의미를 지녀왔으며 지금도 지니고 있다.
고대에는 인간이 하는 일의 유형에 따라 인간을 여러 계급으로 구별하는 전형적인 방법이 사용되었다. 노동자의 육체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육체 노동은 자유인에게는 무가치하다고 여겨 노예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전반적인 복음 메시지의 내용을 그 출발점으로 삼아 이미 구약에 속해 있는 몇 가지 양상을 확장시킴으로써 이 면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특히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11)분이 지상 생활의 대부분을 목수의 작업대에서 육체 노동을 하면서 보내셨다는 사실을 그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그 자체가 대단히 설득력이 있는 ‘노동의 복음’으로, 인간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는 근본이 우선적으로 노동의 종류가 어떤 것이냐에 있지 않고 노동을 하는 사람이 하나의 인격체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의 존엄성은 그 근거를 객관적인 차원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주관적인 차원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볼 때 인간을 그 하는 일에 따라 여러 계급으로 구분했던 예전의 방법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이것은 객관적인 관점에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인간의 노동을 평가할 수 없다거나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노동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차적인 근거는 노동의 주체인 인간 자신이라는 것을 뜻할 뿐이다. 여기에는 윤리성에 대한 아주 중요한 결론이 즉시 따라온다. 즉, 아무리 인간이 일할 운명을 타고났고 소명을 받았다 해도 우선적으로 노동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결론을 통해 누구나 당연히 노동의 객관적 의미보다 주관적 의미가 더 현저하게 부각됨을 깨닫게 된다. 상황을 이렇게 파악해 볼 때 인간이 하는 여러 가지 일들에 크든 작든 객관적인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의 주체, 즉 일을 성취하는 개인인 그 인격체의 존엄성을 척도로 삼아 각각의 노동은 평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노동이 그 활동에 대한 목적─때로는 대단히 요청되는 것이지만 - 을 지닌다 해도 모든 인간이 하는 노동과는 별도로 이 목적만으로는 아무런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사실 결론적으로 분석해 볼 때, 어떤 노동이든 인간이 하는 것이라면 비록 그것이 사회 통념상으로 단지 ‘서비스’로서의 가치밖에 없거나 대단히 단조로워서 소외된 노동으로서의 가치밖에 없다 하더라도 노동의 목적은 항상 인간인 것이다.

가치 전도의 위협

7. 노동에 대한 바로 이러한 중요한 명제들이 풍요한 그리스도교적 진리로부터, 특히 ‘노동의 복음’에 관한 메시지 자체로부터 끊임없이 솟아나와 새로운 방법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산업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근대에 와서 노동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진리는 유물론적이고 경제주의적인 사상을 지닌 여러 가지 동향들에 반대해야만 했다.
이러한 사상을 지지하는 어떤 사람들은 노동을 일종의 ‘상품’으로 이해하고 취급했다. 노동자, 특히 산업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팔리는 것으로 본 것이다. 고용주란 동시에 자본주이기도 했다. 달리 말하면, 생산을 가능케 하는 모든 노동 도구와 수단을 소유한 자를 뜻하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특히 19세기 초반에 널리 퍼졌다. 그 뒤에 이런 종류의 노골적인 표현들은 거의 사라지고 노동에 대해 더욱더 인간적인 방법으로 생각하고 평가하게 되었다. 노동자와 생산 도구 및 수단 사이의 상호 작용은 여러 가지 형태의 집산주의와 병행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자본주의에는 새로 구체화된 상황들과, 노동자의 조합들과 공공 기관의 활동들, 그리고 대규모의 다국적 기업들의 출현 등으로 인해 생긴 또 다른 사회 경제적인 요인들이 개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재화 생산을 위한 특별한 종류의 ‘상품’이나 또는 어떤 비인격적인 ‘힘’(흔히들 ‘노동력’이라 표현한다)으로 취급할 위험이 항상 따른다. 특히 경제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이 유물론적 경제주의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질 때 위험이 항상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평가하기 위한 체계적인 기회(어떤 의미로는 자극)가 일방적으로 물질 문명으로만 치닫는 급격한 발전 과정에 의해 마련된다. 그래서 노동의 객관적인 영역에 일차적으로 중요성을 부여한다. 반면에 모든 것들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노동의 주체와 관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주체는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와 같은 모든 경우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모든 사회 상황 속에서는 맨 처음부터 창세기의 말씀으로 규정된 질서가 어지러워지고 심지어는 전도되기조차 한다. 인간은 자신이 하는 노동과 독립하여 홀로 노동의 실제적인 주체요, 만든 자, 창조한 자로 대접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재화 생산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취급된다.12) 그 계획이나 이름이 어떻든 거기서 발생하는 바로 이러한 질서의 전도는 정당하게도 ‘자본주의’라 일컬어지는데 아래에서 더 충분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반대되는 하나의 체제, 즉 경제 사회적인 체제로서 명백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경제 과정 - 생산 구조에서 우선적인 것은 노동이다 - 에 대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분석해 볼 때 초기 자본주의의 오류가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 오류란 인간이 물질과 동등하게 취급되는 것을 말하는데, 즉 물질적인 생산 수단의 총체로서, 하나의 도구로서 취급되며 자신이 하는 노동의 참된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달리 말해서 인간이 주체요 만드는 자이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생산 과정 전체의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취급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땅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관련된 말씀에 비추어본 인간의 노동에 관한 분석이 어찌하여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의 참된 핵심에 이르는가를 설명한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개별 국가들이나 더 크게는 국제 관계나 대륙간의 관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경제적인 정책의 양상 전반에 걸쳐 중심적인 위치에 있어야 한다. 특히 세계 속에서 느끼는 동서 진영의 긴장뿐 아니라 남북간의 긴장을 생각할 때에 더욱 그렇다. 이와 같은 현대의 윤리, 사회적인 문제의 영역에 관하여 요한 23세는 회칙 맛어머니요 스승」에서 그리고 바오로 6세는 회칙 맛민족들의 발전」에서 특별히 주의를 환기시킨 바 있다.

노동자들의 결속

8. 인간의 노동을 그 주체라는 차원, 다시 말해서 노동을 하는 것은 인격체인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루려한다면 [새로운 사태] 반포 이후 90년 동안 노동의 주관적인 영역과 관련하여 발전되어 온 것들을 적어도 개괄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비록 노동의 주체는 항상 동일하게 인간이지만, 객관적인 면에서는 폭넓은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의 주체라는 이유로 볼 때 노동은 하나의 단일한 것(하나이며 매번 반복될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그 객관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돌려보면 많은 노동이 있다. 즉, 노동의 종류는 다양하다는 것을 수긍하게 된다. 문명의 발달은 끊임없이 이 분야를 넓혀왔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새로운 노동 형태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것들은 사라졌다는 것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 원리로 보아 이러한 것은 으레 있는 현상이라 하더라도 혹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위험한 어떤 불규칙적인 요소들이 끼어들지 않았는지, 끼어들었다면 얼마나 끼어들었는지 또한 살펴보아야 한다.
바로 이 같은 광범위한 변칙 사태가 때로는 ‘프롤레타리아 문제’라고 기술되기도 하는 이른바 ‘노동자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 문제와 이와 관련된 문제들이 정당한 사회적 반발을 야기시켰으며, 노동자들 특히 산업 노동자들 사이에 대단히 돌발적인 결속을 이루게 하여 격렬한 위험 사태로 몰고 갔다. 노동자들 특히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려는 산업 현장에서 더욱더 전문화되고 단조로우며 비인격화된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 결속할 것을 요청하고 단체 행동을 할 것을 요청한 것은 사회 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하고 설득력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노동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지위 하락에 대한 반발이었으며, 노동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임금의 착취와 전대 미문의 노동 조건, 노동자에 대한 사회 보장 문제 등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러한 반발은 노동 세계를 커다란 결속력을 지닌 하나의 공동체로 결합시켰다.
[새로운 사태」나 그 후에 반포된 교회 교도권의 수많은 문헌들이 주장하는 노선을 따른다면, 급격한 산업화가 추진되던 당대의 노동자들이 하늘을 향해 복수를 요청하며13) 자기네들을 무겁게 짓누르던 부당하고 악랄한 체제에 대해 반발한 것은 사회 도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정당한 처사였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사태는 ‘경제주의’를 전제로 하는 자유주의적인 사회 정치적 체제에 유리하였다. 이 체제는 단지 자본가들에 의해서만 경제의 주도권이 강화되고 보호되는 체제였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은 단지 생산의 도구이며, 자본이 생산의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요인이요 목적이라는 것을 근거로 내세워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서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체제였다.
그때부터 노동자의 결속은 더욱더 명백해지고 더욱더 분명해진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각성과 더불어 많은 상황에서 대단히 큰 변화를 초래했다. 신자본주의 또는 집산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여러 가지 새로운 체제들이 안출되었다. 노동자들은 때때로 경영에 참여할 수 있고 생산 관리에 참여할 수 있으며 또 사실상 그렇게 한다. 노동자들은 적절한 조직을 통해 노동의 조건과 보수, 또한 사회법 제정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동시에 다양한 사상 체계나 권력 체제 그리고 사회의 여러 계층에서 생겨난 새로운 관계들이 극도의 부조리를 그대로 용인하거나 새로운 부조리를 만들어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문명과 통신의 발전은 전세계적으로 인간의 생활 조건과 노동 조건에 대한 더욱더 완전한 진단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지난 세기에 노동 세계에서 특별한 결속을 위해 노동자들 사이에 일치를 자극했던 것보다 더 광범위한 다른 형태의 불의도 드러냈다. 이것은 산업 혁명의 과정을 치른 나라들에서 있었던 사실이다. 또한 농업이나 그와 유사한 일을 주요한 노동 영역으로 삼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있었던 사실이다.
노동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결속(이 결속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나 협력을 배제하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운동은 상황이 다른 집단들과 관련을 맺을 필요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집단들은 전에는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 체제와 생활 조건이 바뀜에 따라 사실상 무산 계급화(Proletarianization)라는 것에 영향을 받고 있거나, 비록 명칭이야 그렇지 않을지라도 실제로는 그런 명칭을 붙일 만한 ‘무산 계급’ 상태에 이미 현실적으로 자신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하는 ‘지식 계급(Intelligentsia)’으로 이루어진 어떤 부류나 집단에게도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특히 교육받을 기회가 늘어나고 해당 분야에서 학위나 자격증을 얻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노동에 대한 수요가 증가될 때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와 같이 지식인들의 실직이 생기거나 늘어나는 것은 그들이 받은 교육이 사회가 참으로 필요로 해서 요청하는 고용이나 봉사 형태에 맞지 않거나, 또는 교육 내지는 전문 교육을 요구하는 노동의 수요가 육체 노동의 수요보다 적을 때, 또는 보수가 적을 때이다. 물론 교육은 그 자체로 항상 가치 있는 것이고, 인간의 인격을 풍요롭게 하는 중대한 요소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산 계급화’의 과정은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동의 주체와 그 주체의 생활 조건에 대한 연구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 도처에서, 여러 나라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 안에서 사회 정의를 구현시키려면 노동자들의,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항상 새로운 결속 운동이 필요하다. 노동의 주체에 대한 사회적 지위 격하,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그리고 빈곤과 기아 지역의 증가는 이러한 결속이 현실적으로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요청한다. 교회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태도를 분명히 한다. 교회는 이를 자신의 사명이며 봉사요 그리스도께 대한 충실성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는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시간에 나타난다. 많은 경우에 가난한 이들은 인간의 노동에 대한 존엄성이 침해된 결과로 나타난다. 인간의 노동을 위한 기회가 실직의 결과로 제한되거나 또는 노동과 그에 따른 권리, 노동자 자신과 그 가족의 부양을 보장하는 권리가 평가 절하되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생긴다.

노동과 인간의 존엄성

9. 노동의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맥락 안에서, 인간의 노동에 대한 존엄성을 더욱 밀접하게 규정하는 몇 가지 문제들을 적어도 대략적으로라도 다룰 때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들이 노동의 특수한 도덕적 가치를 더욱 충분히 특징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서도 우리는 “땅을 정복하여라”14)라는 성서의 말씀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의 주권을 노동을 통해서 행사해야 한다는 창조주의 뜻이 이 말씀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이 하느님과의 원초적인 계약을 깨뜨리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15)는 말씀을 듣게 되었어도, 하느님의 모습대로 그분과 비슷하게 창조된16)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의도는 철회되거나 취소되지 않았다. 하느님의 이 말씀은 그때부터 인간의 노동에 따르는 때때로 힘든 노고에 대한 언급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노동이 땅을 ‘주도하는’ 자로서의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세상에 대한 지배를 성취시키는 도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노고는 누구나 체험하는 것이라서 누구나 다 안다. 노고는 때때로 예외적인 노동 조건에서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노고는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헤치며’17) 땅을 가꾸는 일로 긴 나날을 보내는 농부들뿐 아니라, 광부들, 석공들,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일하는 제련공들, 주택 및 기타 건설 현장에서 자주 상해 내지 죽음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익숙해 있다. 또 비슷하게는 정신 노동을 하는 사람들, 과학자들,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결정을 내릴 책임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노고는 밤낮으로 환자들의 병상을 지키는 의사와 간호원들에게도 익숙해져 있다. 노고는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자신들의 역할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도, 가정과 자녀 양육의 책임과 매일매일의 무거운 짐을 지는 여성들에게도 익숙해져 있다. 노고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친숙한 것이며, 노동이 보편적인 사명이기 때문에 노고는 모두에게 친숙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노고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노고 때문에 노동은 인간에게 좋은 것이다. 성 토마스의 결론대로 노동은 비록 힘든 선18)이란 특성을 지니고는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노동이 인간에게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노동은 그것이 유용하거나 즐길 만한 것이라는 의미에서만 좋은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 달리 말해서 인간의 존엄성과 부합하는 것,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고 높여주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도 좋은 것이다. 노동의 윤리적 의미를 더 명백히 정의하고자 한다면 누구나 이 진리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노동이 인간에게, 인간의 인간성에 좋다는 것은 노동을 통해서 인간이 자연을 자기 필요에 따라 이용하면서 자연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기 완성을 이루어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더 인간답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찰이 없이는 근면이 덕이라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고, 더군다나 왜 근면이 덕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덕이란 하나의 도덕적 관습으로서 인간을 인간으로서 선하게 만드는 것19)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노동으로 물질은 가치를 얻게 되나 인간 자신은 존엄성을 잃게 되지 않을까20) 하는 정당한 걱정을 떨쳐주지 못한다. 또 잘 알려진 바로는, 인간을 거슬러 여러 가지 형태로 노동을 이용할 수 있고, 고립된 집단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이란 체제로 인간을 처벌할 수 있으며, 노동이 인간을 압박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노고, 달리 말해서 노동자를 착취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노동의 사회적 질서와 함께 덕으로서의 근면과 관련된 도덕적 의무를 긍정적으로 요청한다. 이 도덕적 의무는 노동으로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의 기력이 쇠진될 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특히 인간에게 고유한 존엄성이나 주체성이 파괴되기 때문에라도, 노동으로 인간성이 격하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과 사회: 가정과 국가

10. 인간의 노동에 관한 개인적 차원에 대해 이렇게 확인했으니, 우리는 노동에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제2의 가치 영역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노동은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이며 소명이기도 한 가정 생활을 이루는 기본이다. 이 두 가지 가치 영역 - 하나는 노동에 연결되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생활에서 가정이라는 성격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 은 올바르게 일치되어야 하고 올바르게 서로 스며들어야 한다. 달리 말해서 노동은 가정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 되는데, 그것은 가정이 노동을 통해서 인간이 정상적으로 얻는 생활 유지 수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노동과 근면은 또한 가정에서의 교육 과정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이가 다른 일들 가운데 노동을 통해서 ‘인간답게 되고’, 인간답게 되는 일이 엄밀히 말해서 교육 과정 전체의 주요 목적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노동의 두 가지 국면이 여기서 명백히 드러난다. 즉, 하나는 가정 생활과 그 유지를 가능케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가정의 목적들, 특히 교육의 성취를 가능케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의 두 가지 국면은 서로 연관되어 있어 많은 점에서 상호 보완한다.
가정이 인간의 노동에 대한 사회적 윤리적 질서를 형성하는 데 막중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는 점을 상기하고 인정해야 한다. 교회의 가르침은 항상 이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이 회칙에서 우리는 이 문제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사실 가정은 노동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공동체인 동시에 누구에게든 집안에 있는 노동을 배우는 최초의 학교가 된다.
노동의 주체라는 이러한 관점에서 파생하는 제3의 가치 영역은 특별한 문화적 역사적 연관을 기초로 하여 인간이 속해 있는 대사회(大社會)와 관계가 있다. 국가라는 성숙한 형태를 아직 갖추지 않았을 때라도 이러한 사회는 각 개인이 가정 안에서 어떤 특정 국가의 문화를 결정하는 내용과 가치를 흡수하고 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도 각자에게 위대한 ‘교육자’일 뿐 아니라, 또한 모든 세대에 걸쳐 노동이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있는 인간성과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자신의 노동으로 동료들과 함께 공동선의 발전을 도모하게 된다. 그리하여 노동이 전인류,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유산 증대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세 가지 영역은 그 주관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의 노동에 항상 중요하다. 그리고 이 차원은, 달리 말해서, 노동자의 구체적 현실은 객관적인 차원보다 우위에 놓인다. 주관적인 차원에서 창세기의 말씀대로 맨 처음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자연계에 대한 ‘지배’가 우선적으로 실현된다. ‘땅을 다스리는’ 바로 그 과정, 즉 노동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특히 금세기에 거대한 발전을 이룩한 기술적인 수단으로 표시된다. 이 발전은 노동의 객관적 차원이 인간의 품위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박탈하거나 감소시키지 않고, 주관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않는 한 유익하고 긍정적인 현상이다.



III. 역사의 현단계에서 본 노동과 자본의 투쟁

투쟁의 차원


11. 위에서 살펴본 노동의 기본 문제들에 대한 개관은 성서 첫 대목에서 착상을 얻은 것으로, 어떻게 보면 이는 다양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전세기를 내려오며 변하지 않았던 교회 가르침의 근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새로운 사태] 반포를 전후로 하여 얻은 체험은, 그 가르침에 특별한 의미와 실질적인 영향력을 부여하는 배경을 형성한다. 요컨대, 노동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치는 막중한 실재로 인식된다. 노동은 바로 노동의 주체인 인간과 인간의 이성적 행위에 밀접히 연결된 실재이다. 일반적으로, 노동이라는 이 실재는 인간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고 그 가치와 의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노고와 노력이 따른다 해도 노동은 역시 좋은 것이며, 그래서 인간은 노동을 사랑함으로써 진보하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긍정적이고 창조적이며, 교육적이고 가치 있는 인간 노동의 특성은 오늘날 인권의 영역에 관한 판단과 결정에 있어서도 그 기조를 이루어야 한다. 또한 노동이 지닌 이러한 특성은 노동에 관한 국제적인 선언들과 여러 나라의 입법부에서 제정한 노동법 안에 그리고 노동 문제에 관한 사회적, 사회 과학적인 활동에 전념하는 기구들이 마련한 ‘노동 규약’들 안에 명백히 나타난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일을 강화시켜 나가는 기구가 국제 노동 기구(ILO)이며, 이 기구는 국제 연합(UN)에서도 아주 오래된 특별 기구 가운데 하나이다.
적어도 노동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주요한 요소들을 염두에 두고서, 본인은 비교적 자세하게 이 중대한 문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본인은, [새로운 사태」의 반포로써 상징적인 시대 구분이 지어진, 최근에 형성된 교회 가르침의 주요 문제들을 무엇보다도 먼저 취급해야 한다.
아직 다 지나가지 않은, 이 시대 전체에 걸쳐 노동 문제는 산업 발달의 시대에, 산업 발전과 더불어 부각된 자본과 노동 사이의 커다란 투쟁의 바탕이 되어왔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이란, 소수이지만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기업주나 생산 수단을 지닌 사람들의 집단과, 생산 수단을 갖지 못해 단지 노동으로만 생산 과정에 참여하는 대다수 사람들 사이의 투쟁을 말한다. 이 투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기업주들의 자의에 맡긴 반면, 기업주들은 최대 이윤 추구의 원리에 따라 고용인들의 노동에 대해 가능한 한 최저 임금을 책정하려고 하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게다가 여기에는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건강과 생활 조건에 대한 보장의 결여 그리고 노동 안전 시설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다른 착취 요소들도 있다.
사회 경제적 계급 투쟁으로 해석되는 이러한 투쟁은 자본주의라는 이념으로 이해되는 자유주의 그리고 노동 계급과 전세계적 무산자들의 대변자로 행세한다고 공언하는 이론적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이해되는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이념적 투쟁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노동과 자본 사이의 실제적인 투쟁은 하나의 조직적인 계급 투쟁으로 바뀌어 이념상의 수단뿐 아니라 주로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투쟁의 역사와 양측의 주장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철학에 근거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 투쟁이야말로 사회의 계급적 불의를 제거하고 계급 자체를 없애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생산 수단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집단적인 차원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인간의 노동을 착취로부터 보전할 수 있게 한다는 생산 수단의 집단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이 투쟁 목표이며 이 투쟁은 이념 수단만이 아니라 정치 수단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무산자의 지배라는 원칙에 따라 마르크스주의 이념을 따르는 정당으로서의 집단은 혁명 세력을 포함한 여러 가지 영향력을 행사하여 생산 수단의 사유를 배제하고 집단 체제를 도입하기 위하여 모든 사회의 권력 독점을 추구하고 있다. 이처럼 광범위한 국제 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이나 이념가들에 의하면, 이러한 행동 강령의 목표는 사회 혁명을 성취시키고 사회주의를 도입하여 결국은 전세계를 공산주의 체제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현대의 사회, 경제, 정치, 국제 생활의 전반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세한 부분까지 다룰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방대한 문헌들과 체험을 통해서 그러한 문제들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엽적인 문제들보다는 차라리 이 회칙의 주제인 인간의 노동에 대한 근본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이처럼 중대한 문제, 즉 인간의 지상 생활과 그 소명에 대한 근본적인 차원을 이루고 있는 이 문제는 현대의 전체적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할 때에 비로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동의 우위성


12. 오늘날의 상황 구조는 인간에 의해 야기된 수많은 투쟁들이 현저하며 인간의 노동이 만들어낸 기술 수단은 이 같은 구조 안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파괴 능력을 지닌 핵전쟁으로 인한 전세계적 파멸의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우리는 우선 교회가 항상 가르쳐왔던 원칙, 즉 노동이 자본보다 우위에 있다는 원칙을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 원칙은 생산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이다. 생산 과정에서 노동은 항상 주요 동인(Efficient Cause)이 되지만, 생산 수단의 집적인 자본은 다만 하나의 도구 또는 도구인이 될 뿐이다. 이 원칙은 인간의 역사적 체험의 총체에서 얻은 명백한 진리이다.
인간은 땅을 지배해야 한다는 성서의 첫 장을 읽을 때, 우리는 이 말씀이 가시적인 세상에 내재해 있고, 인간의 임의에 맡겨진 모든 자원에 관한 언급이라는 것을 안다. 어쨌든 이 자원들은 오직 노동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소유권 문제는 맨 처음부터 노동과 연관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자연 속에 감추어져 있는 자원을 자기 자신과 남을 위해 이용하도록 하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노동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이 자원들이 어떤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지하, 해양, 지상, 우주 등 자연의 다양한 부 가운데 작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인간은 이 모든 것을 자기의 일터로 끌어들여 차지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노동을 위하여 자연의 부를 소유하는 것이다.
동일한 원칙은 이러한 과정의 후속 단계에도 적용되는데, 그 첫단계는 인간이 자연의 자원 및 부와 항상 관련을 맺게 한다. 이 부들을 발견하고 인간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할 목적으로 지식을 얻으려 하는 이 모든 노력이 가르쳐주는 바는, 그것이 노동이거나 생산 수단의 총체 또는 (노동에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생산 수단에 관련된 기술이거나 간에 경제적인 생산 과정 전체를 통해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이 세상의 부와 자원을 전제로 하는데, 이 부와 자원은 인간이 발굴해 내는 것이지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생산 과정에서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이미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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