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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84.02.11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 (0)
작성자 : 복음화위원회
등록일 : 2008.03.01 10:45
조회수 : 1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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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이르는 고통
SALVIFICI DOLORIS

인간 고통의
그리스도교적 의미에 관하여
가톨릭교회의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수도자 가족들과 신자들에게 보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교서


차 례

Ⅰ. 서 론
Ⅱ. 인간 고통의 세계
Ⅲ. 고통의 의미문제에 대한 해답의 추구
Ⅳ. 사랑으로 고통을 극복하신 예수 그리스도
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
Ⅵ. 고통의 복음
Ⅶ. 착한 사마리아 사람
Ⅷ. 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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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형제 주교들과
친애하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에게


I. 서 론

1.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의 힘을 밝히면서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1)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 역사의 일부를 이루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비추어지는 고통을 통하여 굽이치는 머나먼 길의 마지막에 이르러 발견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기쁨이 따르는 마지막 발견의 가치가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 바오로는 쓰시기를,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2)고 하였습니다. 기쁨은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며, 이 발견은 이 말씀을 적어보낸 다르소의 바오로가 몸소 절실히 체험하셨던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타당한 것입니다. 사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발견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또 그것을 기뻐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도움이 된 것과 똑같이 “고통의 구원적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바로 이 구원적 의미의 측면에서 고통이라는 주제는 교회의 특별한 경축년으로서의 구원의 성년과 때마침 깊이 관련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또한 이 기간 동안에 마땅히 이 주제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사실을 제쳐놓고라도 이 주제는 땅 위의 어느 곳에서나 인간을 따라다니고 있는 보편적인 주제입니다. 즉,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세상에서 인간과 공존하고 있는 것이며, 끊임없이 거듭 재고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3)고 쓰신 바도 있지만, 또 비록 우리는 동물계의 고통을 알고 있으며 이것이 인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통’이라는 말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인즉, 특히 인간의 본성에 본질적으로 관련된 의미를 띠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고통은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고통이야말로 특별히 그 나름대로 인간에게 고유한 깊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또 특별히 그 나름으로 그것을 능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인간의 초월성에 속해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인간이란 어떤 의미에서 인간 자신을 넘어서 나아가도록 “운명 지어져” 있으며 신비로운 방식으로 이 초월성을 향하여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들 중의 하나가 고통인 것입니다.

3. 고통이라는 주제는 특별히 구원의 성년이라는 맥락 속에서 다루어질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우선 첫째로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즉 그리스도의 고통을 통하여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동시에 구원의 성년 동안 우리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에 표현되어있는 진리, 곧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이 교회가 따라걸어야 할 길이 된다.”는 진리를 상기하고 있습니다.4) 말하자면 특별히 인간은 자신의 삶이 고통에 처했을 때 교회가 추구하는 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이 인간의 고통은 삶의 여러 다른 순간에 발생하고, 여러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며, 여러 다른 차원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로든간에 고통은 인간의 현세적 실존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으로 보이며 또 사실 그러합니다.
이와 같이 현세생활의 여정을 통과하면서 인간이 어떠한 모양으로든 머나먼 고통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할진대, 바로 이 길에서 교회는 언제나 인간을 만나야 합니다. 더구나 특별히 이 구원의 성년 동안에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구원의 신비로 말미암아 태어난 교회이기에, 교회는 특별히 인간의 고통의 길에서 인간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만남 속에서 인간이 “교회가 따라걸어야 할 길이 되는” 것이며, 이 길은 가장 중요한 길의 하나인 것입니다.

4. 이것은 또한 바로 이 구원의 성년에 바야흐로 우리가 반성하고 있는 바, 곧 고통에 관한 묵상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고통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그것은 경외심과 특별히 그 나름으로 무서운 위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고통 속에는 특별히 하나의 큰 신비가 내포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형태의 인간 고통에 대한 이러한 특별한 경외심을 전제함으로써만, 앞으로 여기서 표현될 내용이 깊디 깊은 내심의 요청에 의하여, 또한 역시 깊은 심오한 신앙의 명령에 따라 전개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이 두 가지 동기는 서로 특별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내심의 요청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겨낼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신앙의 명령이-예컨대 첫머리에 인용된 바오로 성인의 말씀으로 표현된 내용처럼-그 내용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또 신앙의 힘으로 우리는 모든 인간 안에서 그처럼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일로 보이는 그것을 감히 다룰 수 있습니다. 무릇 인간은, 더구나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은, 언제나 결코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II. 인간 고통의 세계

5. 인간의 구체적이며 되풀이될 수 없는 내면에 내포되어있는 하나의 인격적 사실로서의 주관적인 차원에서 보면, 고통이란 거의 형언할 수 없고 양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또 아마도 동시에 “객관적인 현실”에서 보면 하나의 뚜렷한 문제점으로서 다루어지고 묵상되며 파악되어야 할 점이 고통처럼 많은 것도 다시 없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고통에 대한 물음과 대답은 근본적으로 제기되고 모색되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여기서 다루는 문제가 고통에 관한 단순한 설명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인간 고통의 세계에 파고들자면, 설명의 차원을 넘어서는 다른 기준들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과학이자 또한 치료의 기술이기도 한 의학은 인간 고통의 광대한 분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영역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 영역에서는 고통의 정체가 좀더 정확히 파악되고 있으며, 고통에 “대응”하는 방법(즉, 치료의 방법)이 비교적 더 균형있게 개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 한 가지 영역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 고통의 분야는 훨씬 더 넓고 더 다양하며 더 다차원적입니다. 인간은 여러 모양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아무리 전문적으로 발전된 의학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의학이 생각하는 모양으로만 인간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이란 질병보다 훨씬 더 넓은 개념입니다. 훨씬 더 복잡한 동시에 훨씬 더 깊이 인간성 그 자체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 고통입니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구별하는 데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어떤 개념을 얻게 됩니다. 이 구별은 인간 존재의 이중적 차원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고통의 직접적인 주체로서의 육체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를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고통”과 “아픔”이라는 낱말이 어느 정도까지는 동의어로서 사용될 수 있다고 할진대, 육체적 고통이란 어떻게든지간에 “몸에 해로운” 일이 있을 때에 나타나며, 한편 정신적 고통이란 “영혼의 아픔”이 있을 때 나타납니다. 실제로 고통이란 영신적 성격을 띤 아픔의 문제이며, 단순히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이 함께 따르는 “심리학적” 차원의 아픔에 관한 문제만은 아닙니다. 확실히 정신적 고통의 광범성과 다양성은 숫자적으로나 형태상으로 육체적 고통보다 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동시에 정신적 고통은 이를테면 그 정체가 덜 파악되어있으며 치유의 방법도 덜 성취되어있다고 하겠습니다.

6. 성서는 하나의 커다란 고통에 관한 책입니다. 고통의 표지, 특히 정신적 고통의 표지를 지니고 있는 상황들의 몇 가지 사례를 구약성서에서 인용해보면, 죽음의 위험,5) 자기 자식들의 죽음,6) 그것도 특히 맏아들과 외아들의 죽음,7) 또 그 다음으로는 후손의 결핍,8) 고국에 대한 향수,9) 주위 환경의 박해와 적대,10)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조롱과 경멸,11) 고독과 소외감,12) 그리고 양심의 가책,13) 왜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14) 친지들과 이웃들의 불성실함과 무례함,15) 그리고 끝으로 자기 동족의 비운16) 등이 그것입니다.
심리적이며 육체적인 “전인”으로서의 인간을 다루면서 구약 성서는 흔히 “정신적” 고통을 육신의 특별한 부분, 즉 뼈,17) 신장,18) 간장,19) 내장,20) 심장21) 등의 아픔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실제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거니와, 정신적 고통은 “육체적” 요소 또는 신체적 요인을 지니고 있으며, 흔히 유기체 전체의 상태로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7. 위에서 인용한 사례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서에서 우리는 인간의 갖가지 고통스런 상황들이 방대하게 열거되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열거된 내용들도 물론 “인간 역사의 책”(이것은 오히려 “기록되지 아니한 책”이다)이 고통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말해왔고 끊임없이 되풀이해온 모든 것을 다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모든 개인 각자의 역사를 통하여 읽혀져온 인류 역사의 책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인간은 어떤 종류이든 악을 경험할 때마다 고통을 겪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어휘는 고통과 악이 서로 일치되어있습니다. 사실 구약성서의 어휘에는 “고통”을 가리키는 특별한 낱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고통받고 있는 모든 것을 “악”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22) 그리스어만이, 또 따라서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만이 “파스코”(πασχω:나는……을 겪는다. 나는 고통받고 있다는 느낌을 경험한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동사 덕택에, 고통은 이미 직접적으로 악(객관적)과 동일시될 수는 없는 것이 되며, 인간이 악을 경험하고 그래서 고통의 주체가 되는 그런 상황을 표현하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고통은 실로 능동적인 성격과 수동적인 성격을(“patiendo”)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고 있을 때에도, 인간 자신이 고통의 원인일 때에도, 이 고통은 여전히 그 형이상학적인 본질에서는 수동적인 것임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 심리학적인 의미에서는 특별히 구체적인 “능동성”을 띠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이것은 고통받는 주체가 겪는 고통의 강도에 따라 또 각자의 특별한 민감성에 따라 슬픔이나 실망이나 실의나 또는 심지어 절망 등 여러 가지로 주관적인 면에서 세분화되는 그런 고통의 “능동성”을 말합니다. 고통의 심리학적 형태를 이루고 있는 내용의 한복판에 으레 악의 체험이 있게 마련인데, 이것이 각개인에게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고통이라는 현실은 악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제기합니다. “악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어떤 의미에서 고통이라는 주제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반응은, 예컨대 특정한 문화와 종교의 전통들이 존재란 해방될 필요가 있는 악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그런 반응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존재란 선이며 존재하는 것은 선한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창조주의 선하심을 인정하며 피조물의 선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것은, 악이란 선의 어떤 결핍이나 제한 또는 왜곡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가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로부터 단절되어있는, 또는 자기가 박탈당하게 된, 그런 선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물의 정상적인 질서에서는 그러한 선에 “마땅히” 참여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 인간은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적으로 보면 고통이라는 현실은 악을 통하여 설명되며, 악은 언제나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의 선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8. 그 자체로 인간의 고통은 이를테면 하나의 특별한 “세계”를 이루어, 인간과 함께 존재하고 인간 안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때로는 사라지지 않고 경직되어 인간 안에 깊이 뿌리를 박게 되기도 합니다. 이 고통의 세계는 많은, 매우 많은 주체들 속으로 나누어져 들어가서 이를테면 “산재”하고 있습니다. 각개인이 각자의 고통을 통하여 이 “세계”의 작은 일부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세계”가 그 사람 안에 하나의 무한하고도 둘도 없이 유일한 실체로서 현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병행하여 인간 상호간의 사회적 차원도 있습니다. 고통의 세계는 이를테면 그 고유한 연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은 운명의 시련을 당하고 있다는 상황의 유사성을 통하여, 또는 이해와 배려를 받을 필요성을 통하여, 또 아마 무엇보다도 고통의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을 통하여 서로가 비슷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통의 세계는 “산재”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 안에 소통과 연대라는 단일한 요청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요청에도 따르면서 반성해나가야 하겠습니다.
고통의 세계가 개인적인 의미와 동시에 집단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인즉, 이 인간 고통의 세계가 인간 실존의 어떤 시기와 어떤 기간에는 이를테면 구체적으로 집중화되어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천재지변과 전염병과 파국과 격동과 갖가지 사회적 재난들의 경우에 그렇게 됩니다. 한 가지 예로 흉작을,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또는 여러 다른 원인들과 관련하여-기근을 생각해보십시오.
끝으로, 전쟁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전쟁에 관해서 본인은 특별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특히 지난 양대 세계대전을 언급하고 싶거니와, 그중에도 제2차 세계대전은 훨씬 더 큰 인명 손실과 무거운 인류 고통의 짐을 초래하였습니다. 또한 그 결과로 또 한편으로는 우리네 현대 문명의 과오와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 후반부는 가공할 핵전쟁의 위협이 실로 엄청나게 도사리고 있어서, 인류의 자멸조차 초래할 수 있을 만큼 유래없는 고통의 축적을 생각지 않고서는 우리가 이 시기를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요컨대 인간 각자 안에 그 주체가 있는 그런 고통의 세계가 우리네 시대에는 아마도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하나의 특별한 “세계”로 변형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이 세계는 유례가 없이 인간의 노력을 통한 진보에 의하여 변형되어온 세계인 동시에, 역시 유례가 없이 인간의 과오와 범죄로 말미암아 위험에 처해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III. 고통의 의미문제에 대한 해답의 추구

9. 인간이 겪는 모든 형태의 고통 속에서마다, 또 동시에 온 고통의 세계 밑바탕에서부터, 불가피하게 “왜?”라는 물음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고통의 원인, 이유에 관한 물음일 뿐더러, 또 마찬가지로 고통의 목적에 관한 물음이며, 요컨대 고통의 의미에 관한 물음입니다. 그것은 비단 인간의 고통에 수반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인간적인 내용을, 무엇이 고통을 바로 인간의 고통이 되게 하는지를 결정짓기까지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픔이, 특히 육체적인 아픔이 동물의 세계에 널리 퍼져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고통 중에 있는 인간만이 자기가 고통받고 있음을 알며 왜 그런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하면, 인간적으로 말해서 훨씬 더 깊이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 문제가 어려운 문제임은, 이 문제와 일정하게 밀접한 문제인 악의 문제가 어려운 문제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악은 왜 존재하는가? 어째서 세상에 악이 있는가? 이런 식으로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고 있을 때에, 우리는 고통에 관한 물음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물음이 다 어려운 물음입니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물을 때에도 그러하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물을 때에도 그러하며,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느님께 물을 때에도 그러합니다. 흔히는 바로 세계에서부터 인간에게로 고통이 오고 있는 데도, 인간은 이 물음을 세계를 향하여 묻지 않고, 세계의 창조자이며 주인이신 하느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잘 알려져있다시피, 바로 이 물음과 관련하여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수많은 좌절과 갈등이 일어날 뿐 아니라, 또한 사람들이 사실상 하느님을 부인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세계의 존재가 하느님의 존재를 향하여, 하느님의 지혜와 권능과 위대하심을 향하여 이를테면 인간 영혼의 눈을 열어주고 있는가 하면, 또 한편 악과 고통은 이 모습을 흐리게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때로는 철저히 근본적인 방식으로, 특히 부당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수많은 경우와 합당한 처벌이 따르지 않는 수많은 과오라는 일상의 드라마에서야말로 그러합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환경에서보다도 바로 이런 환경에서야말로 고통의 의미문제가 중요하게 드러난다 하겠습니다. 또한 문제 자체를 다루거나 이 문제에 대한 모든 가능한 해답을 다루면서 얼마나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할지도 드러납니다.

10. 인간은 이 문제를 하느님께 모든 감정을 다하여 또 낙담과 불안에 가득 찬 마음으로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약성서의 계시에서 보게 되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이 물음을 예상하고 계시며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욥기에서 이 물음이 지극히 생생한 표현으로 나타나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잘못은 조금도 없이 무수한 고통으로 시련을 당하는 이 의로운 인간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있습니다. 욥은 재산을 잃고 아들딸들을 잃으며 마침내는 자기 자신마저 중병에 걸립니다. 이런 무서운 처지에 빠진 욥에게 오랜 친구 셋이 집으로 찾아와서 저마다 저 나름으로 자기 주장으로 설득시키려 합니다. 욥이 그처럼 갖가지로 무서운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보니, 무엇인가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음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이란 으레 인간의 범죄에 대한 처벌로서 나타나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고통을 보내시는 것이며, 고통의 이유인즉 정의의 질서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욥의 옛 친구들은 비단 악의 윤리적 정의를 그에게 확신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의 윤리적 의미를 자기 자신들에게 정당화하려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고통이란 죄에 대한 벌로서만, 따라서 선을 선으로 갚고 악을 악으로 갚으시는 하느님의 정의라는 차원에서만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주목해야 할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여러 기록들이 고통을 인간의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벌로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의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현세적 권위도 능가할 정도의 입법자요 심판자이십니다. 계시의 하느님께서는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창조주이시며, 그분으로부터 피조물의 존재와 더불어 본질적인 선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 선에 대한 인간의 의식적이며 자유로운 침해는 단순히 법에 대한 침해일 뿐 아니라 동시에 최초의 입법자이신 창조주께 대한 배반인 것입니다. 그러한 침해가 성서와 신학이 엄밀한 의미로 말하는 죄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죄의 윤리적 악에 상응하는 것이 벌이요, 벌은 똑같은 초월적인 의미에서 윤리 질서를 보장하며, 이런 의미에서 이 질서는 창조자요 최고 입법자이신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설정되어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또한 계시에 바탕을 둔 종교적 신앙의 기쁜 진리 중의 하나가 도출되어나옵니다. 즉 하느님은 상선벌악하시는 의로운 심판자이십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일이 옳았으며……당신의 길은 곧바르며 당신의 심판은 언제나 올바릅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내리신……모든 징벌에서 당신의 판결은 옳았습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이런 징벌을 내리신 것은 우리 죄 때문이고 우리는 당신의 징벌을 받아 마땅하옵니다…….”23)
욥의 친구들에 의하여 표현된 의견은 또한 인류의 윤리적 양심 안에서도 발견되는 확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객관적인 윤리 질서는 죄악과 범행에 대한 징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고통은 하나의 “정당화된 악”으로서 나타납니다. 고통을 죄에 대한 벌로서 설명하는 사람들의 확신은 정의의 질서에 그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것은 욥의 친구 중의 한 사람에 의하여 표현된 확신과도 부합합니다. “내가 보니, 땅을 갈아 악을 심고 불행의 씨를 뿌리는 자는 모두 그 심은 대로 거두더군.”24)

11. 욥은 고통의 정체를 죄에 대한 벌로 규정하는 원칙적인 진리에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경험상의 의견을 기초로 이러한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기가 그러한 벌을 마땅히 받아야 할 짓을 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사실 그는 자기 일생 중에 좋은 일들을 행하여왔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 자신이 욥의 친구들의 비난을 나무라시며, 욥은 죄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십니다. 욥의 고통은 결백한 사람의 고통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비로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며, 그것을 한 개인의 지능만으로 완전히 꿰뚫어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욥기가 구약과 신약의 계시 전체에 의하여 제시되어있는 바 정의에 바탕한 초월적 윤리 질서의 기초를 침범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은 이 질서의 원리가 배타적이며 피상적인 방법으로 적용될 수만은 없다는 것을 극히 단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통이란 그것이 과오와 연결되어있을 때에는 벌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 사실인가 하면, 모든 고통이 잘못의 결과이며 벌의 성격이 있다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욥이라는 의인상은 구약성서에서 이를 입증하고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하느님 자신의 말씀인 계시는 한 결백한 인간의 고통, 즉 죄없이 겪는 고통이라는 문제를 지극히 솔직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욥은 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욥이 무참한 시련에 짓눌린 것은 사실일지언정, 욥에게 벌이 내려질 이유란 없었던 것입니다. 욥기의 서두에서 이미 뚜렷이 나타나고 있듯이, 하느님은 이 시험을 사탄의 도발로 말미암은 결과로서 허용하셨습니다. 사탄이 주님 앞에서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당신께서……그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축복해주셨고 그의 가축을 땅 위에 번성하게 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보십시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25) 하고 욥의 의로움에 대하여 도전을 감행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과연 욥을 고통으로 시험하기를 동의하시었다면, 그것은 욥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었던 것입니다. 고통은 이와 같이 하나의 시험이라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욥기는 계시에 있어서 이 문제에 관한 최후의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욥기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하나의 예고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자체로도 욥기는, 어째서 고통의 의미에 관한 물음에 대한 답이 무조건 정의에 바탕을 둔 윤리 질서에만 결부시켜져서는 안되는가를 말해주는 충분한 논증이 됩니다. 그러한 대답이란 한편으로는 기본적이며 초월적인 이유와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또한 동시에 의인 욥의 고통과 비슷한 경우들은 부족한 대답임이 드러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은 우리가 계시에서 마주치게 되는 정의의 개념을 사소하고 빈약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12. 욥기는 고통의 “왜”라는 문제를 극도로 첨예하게 제기하고 있으며, 또한 고통이 무죄한 자에게 닥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직 문제에 대한 해결을 제시해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도 이미 우리는 고통이 죄에 대한 벌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라는 그런 관념을 넘어서기 시작하고 있는 방향을 주목할 수 있지만, 그만큼 또한 동시에 구약성서는 벌로서의 고통이 지닌 교육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선민에게 내리시는 고통들 속에는 회개시켜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초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징벌은 우리 민족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찍질하시려는 것이었다.”26)
이와 같이 벌의 인격적인 차원이 긍정되고 있습니다. 그 차원에 따르면 벌이 의미가 있는 까닭은 단순히 그것이 범죄라는 객관적인 악을 다른 또 하나의 악으로써 응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그것이 고통받고 있는 주체 안에 선을 재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성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통의 지극히 중요한 일면이며, 구약과 특히 신약의 계시 전체에 깊이 뿌리박혀있습니다. 고통은 주체 안에서 회개에, 즉 선의 재건에 기여해야 하며, 그 주체는 이 회개에의 부르심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참회의 목적은 인간 안에 갖가지 형태로 잠복해있는 악을 극복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목적은 또한 인간 자신에게나 타인들과의 관계와 특히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나 선을 강화하는 데에 있습니다.

13. 그러나 고통의 “왜”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얻자면,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가 흘러나오는 궁극 원천인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계시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랑은 또한 언제나 하나의 신비로 머물러있게 마련인 고통의 의미가 흘러나오는 가장 풍부한 원천입니다. 우리는 비록 우리의 설명이 부족하고 부당함을 의식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숭고한 사랑을 터득할 수 있는 그만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신비 속으로 들어가서 고통의 “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의 심오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여러모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 주체를 향하여 우리 자신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계시의 빛을 있는 그대로, 비단 그것이 정의의 초월적 질서를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만이 아니라 또한 그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결정적인 원천으로서의 사랑으로 이 질서를 비추어주고 있는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랑은 또한 고통의 의미문제에 대한 해답의 가장 충만한 원천이기도 합니다. 이 해답이 하느님에 의하여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IV. 사랑으로 고통을 극복하신 예수 그리스도

14.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27) 니고데모와 대화 중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바로 핵심으로 우리를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교 구원론, 즉 구원신학의 바로 본질을 갈파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또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고통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을 악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세상”에 당신 아들을 주시는데, 바로 그 자체 안에 고통에 관한 결정적이며 절대적인 전망이 담겨있습니다. 동시에 “주신다”(“주셨다”)는 말씀 자체가 이 해방은 외아들 그분에 의하여 그분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안에서는 사랑이 표명되고 있는데, 그것은 외아들 그분의 무한한 사랑이요, 이 때문에 당신 아들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위한 사랑, “세상”을 위한 사랑입니다. 즉, 구원적인 사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함께 반성함에 있어서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겠거니와-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의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것은 정의라는 한계 내에서 고통의 의미를 추구할 때에 결정되어있던, 어떤 의미에서는 결론지어져 있던 그런 차원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이 차원은 구속의 차원입니다. 이 차원을 구약성서에서는, 적어도 불가타 역본에서는 의인 욥의 말이 이미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있음을! 마침내……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28) 지금까지 우리의 고찰은 일차적으로 또 어떤 의미에서는 전적으로 고통의 갖가지 현세적인 차원에 (의인 욥의 고통도 또한 그러하듯이) 집중되어있었던 반면에, 위에서 인용한 예수의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고통의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의미를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멸망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 외아들을 보내주셨는데, “멸망하지 않게”라는 이 말씀은 바로 그 다음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라는 말씀에 의하여 구체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생”을 잃을 때에 “멸망”합니다. 구원에 대립되는 것은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단순히 현세적인 고통이 아니라 결정적인 고통, 즉 영생의 상실이요, 하느님에게 배척당하는 것이며, 영벌인 것입니다. 외아들 그분이 인류에게 주어진 것은 일차적으로 이 결정적인 악에 대항하고 결정적인 고통에 대항하여 인간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원의 사명을 띠고 보내심을 받은 하느님의 아드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초월적인 악을 바로 그 뿌리에서부터 쳐부수셔야 하셨던 것입니다. 이 초월적인 악의 뿌리들은 죄와 죽음이라는 땅속에 뻗쳐있습니다. 즉, 죄와 죽음이야말로 영생을 상실하는 장본입니다. 외아들의 사명은 죄와 죽음의 정복에 있습니다. 그분은 죽기까지의 순종으로써 죄를 극복하시는 것이며, 부활로써 죽음을 정복하시는 것입니다.

15.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명에 의하여 악을 그 뿌리에서부터 쳐부수신다고 말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즉, 비단 결정적 종말론적인 악과 고통의 타도(그리하여 인간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적어도 간접적으로나마 현세적 역사적인 차원의 악과 고통의 타도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실 악은 여전히 죄와 죽음에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또 비록 우리가 인간의 고통을 구체적인 죄들의 결과로 판단하는 데에는 크게 조심해야 하지만 (이 점은 바로 의인 욥의 사례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고통을 시초의 죄, 요한 성인이 이른바 “세상의 죄,”29) 인간 역사에서 개인적 행동과 사회적 과정의 죄스런 배경에서 분리시켜놓을 수도 없습니다. 직접적 의존관계라는 편협한 판단 기준을 (욥의 세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여기에 적용하는 것이 허용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또한 이에 못지않게 인간 고통의 근저에는 죄와의 복합적인 연루관계가 있다는 비판 기준을 배격할 수는 없다는 것도 진실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음을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은 흔히 현세생활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 기다려지기까지 합니다. 동시에 죽음은 육체적 유기체에 있어서나 심리적인 면에 있어서나 이를테면 파괴 작용의 결정적인 종결을 이룬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심신적 인격 전체의 해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영혼은 생존하여 육체에서 분리되어 존속하는 반면에, 인류 역사의 태초에 인간이 범죄한 다음에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육체는 점차적으로 분해되어가는 것입니다.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 가리라.”30) 그러므로 비록 죽음이 그 낱말의 현세적 의미에서 고통의 한 형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비록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의 모든 형태를 초월한다 하더라도, 동시에 인간이 죽음에서 경험하는 악은 결정적이며 총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외아들께서는 당신 구원사업에 의하여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십니다. 우선 첫째로는 원죄와 더불어 비롯하여 악령의 영향력 아래 인간의 역사 안에 뿌리를 내린 죄의 지배를 불식하시며, 그 다음으로는 인간에게 성화은총 속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신 데 이어, 또한 미래의 육신 부활을 시작하는 당신 부활에 의하여 죽음의 지배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영생”의, 즉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결정적인 행복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고통이 완전히 불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의 결과로 인간은 영원한 삶과 거룩함의 희망을 가지고 지상에 실존합니다. 그리고 비록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가 인간의 삶에서 현세적인 고통을 제거해주는 것은 아니며, 인간 실존의 역사적 차원 전체를 고통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 차원과 모든 고통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즉, 구원의 빛을 던져주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복음 곧 기쁜 소식의 빛입니다. 바로 이 빛의 핵심에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개진된,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31)라는 진리가 있습니다. 이 진리는 인간의 역사와 현세적 상황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즉, 죄가 태초 이래의 유산인 “원죄”로서나 “세상의 죄”로서나 또 각자의 “본죄”들의 총계로서나 현세의 역사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외아들을 사랑해오신 것이고, 다시 말해서 영원히 사랑하고 계신 것이고, 때가 이르러 마침내는 바로 이 비할 데 없이 드높은 사랑을 통하여 이 아드님을 “주심”으로써, 이분이 바로 인간의 악의 뿌리 자체를 쳐부시고 인간이 참여하고 있는 고통의 세계 일체에 구원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게 하신 것입니다.

16. 이스라엘 한복판에서 메시아로서 활약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고통의 세계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32) 그분의 활동은 일차적으로 고통 속에서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과 관련되어있었습니다. 그분은 병자들을 치유해주셨고, 괴로운 이들을 위로해주셨으며,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을 귀먹음에서, 눈멈에서, 문둥병에서, 악마에게서, 갖가지 신체적 장애에서 풀어주셨으며, 죽은 이들을 소생시켜주신 일도 세 번 있었습니다. 그분은 육신의 고통이든 영혼의 고통이든 인간의 모든 고통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은 가르침을 주셨고, 그리고 동시에 그분의 가르침에 있어서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여덟 가지 행복의 선언이었는데, 이것은 현세생활에 있어서 갖가지 고통으로 시련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즉,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들”을, 그리스도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는 사람들”을…….33) 마태오에 따르면 이와 같이 되어있거니와, 루가는 아주 분명하게 “지금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34)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뭏든,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도 인간 고통의 세계에 다가오셨는데, 이것은 그분이 이 고통을 바로 당신 자신에게 받아들이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공적인 활약을 하시는 동안에 그분은 비단 피로와 집없는 처지와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는 일을 겪으셨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더 중대한 사실로서 점점 더 소외를 당하고 적의에 둘러싸이게 되셨으며 자기를 죽이려고 계획하는 음모에 직면하게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알고 계셨으며, 자주 제자들에게 고통과 죽음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이방인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침뱉고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35) 그리스도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시며, 바로 이런 방법으로 당신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 고통을 수단으로 하여 그분은 인간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야 하신 것입니다. 바로 당신 십자가를 수단으로 하여 그분은 인류 역사와 인간 영혼에 뻗어내려 있는 악의 뿌리를 쳐부수셔야 하신 것입니다. 바로 당신 십자가를 수단으로 하여 그분은 구원사업을 성취하여야 하신 것입니다. 이 사업은 영원하신 사랑의 계획 속에서 구속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당신으로 하여금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고 죽을 생각을 버리시게 하려고 하자 준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36) 또 게쎄마니에서 당신이 체포되실 때에, 베드로가 칼로써 당신을 보호하려고 하자,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그렇게 한다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한 성서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37)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38)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복음서의 다른 데서도 거듭 나타나고 있는 바이거니와, 이것은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39)고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이미 표명하신 생각이 그리스도께 얼마나 깊이 사무쳐있었던가를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의 구원하는 능력을 의식하시면서 당신 자신의 고통을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나아가시되, 일차적으로는 아버지께서 세상과 세상의 인간을 사랑하신 이 사랑 안에서 아버지께 일치되어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성인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쓰기를,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40)이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17. 성서의 말씀은 성취되어야 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메시아에 관한 수많은 대목들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장차 주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분이 겪을 고통들의 그림자가 이미 드리워져있었습니다. 이 모든 대목들 가운데서도 특히 감동적인 것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통칭 고통받는 종의 넷째 노래라는 대목입니다. “제5복음사가”라고 일컬어져온 이사야 예언자는 이 노래에서 고통받는 종의 모습을 마치 자신의 육안과 영안으로 바라보듯이 날카로운 사실적 묘사로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구절들에 비추어보면 그리스도의 수난이 복음사가들 자신의 묘사에서보다도 더 인상적이며 감동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그야말로 고통을 겪고 고뇌를 아는 사람의 모습이 우리 앞에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41)
고통받는 종의 노래에 담겨있는 묘사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각단계와 여러모로 세세한 점에서 부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체포, 천대, 구타, 침뱉음, 수감자에 대한 멸시, 부당한 선고, 그 다음에는 채찍질과 가시관과 조롱, 십자가를 짊과 십자가에 못박힘과 고뇌 등이 그렇습니다.
예언자의 말씀에서 이 수난의 묘사보다도 훨씬 더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그리스도 희생의 깊이입니다. 보십시오, 그분은 죄가 없으시면서도 스스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져 스스로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짊어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즉, 널리 또 깊이 인간의 모든 죄가 구속자의 고통의 진정한 이유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의 정도란 악을 겪게 되는 정도에 의하여 “측정되는” 것일진대, 그렇다면 우리는 예언자의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짊어지신 고통과 악의 정도를 능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대행적인”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구속적”입니다. 예언자가 말하고 있는 “고통을 겪고 고뇌를 아는 사람”이란 참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42) 그분이십니다. 홀로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분만이 모든 죄의 악을 극복하는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써 모든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받아들이실 수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그분의 고통 속에서 죄들이 불식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분은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관계라는 영적 공간에서 이 악을 없애시고 선으로 이 공간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속적 고통의 주체인 단일한 위격이 지니고 있는 본성의 이중성에 접하게 됩니다.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에 의하여 구속을 이루어주시는 그분이 하느님께서 “주신” 외아들이시며 또 동시에 이 하느님과 동일한 본체이신 아드님이 한 인간으로서 고통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고통은 인간의 차원들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또한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심도와 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받는 인간 그 자신이 바로 외아들 그분 곧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하느님”이시기에, 그분의 고통은 인간적인 동시에 또한 비할 데 없이 깊고 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로지 외아들 그분만이 인간의 죄에 내포된 악의 총량을, 즉 지상의 인류가 역사상으로 실존하는 차원들에 따른 모든 죄와 그 모든 죄의 “총계”에 내포된 악을 포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18. 위에서 고찰한 바 바야흐로 우리는 이사야서에 담겨있는 고통받는 종의 노래가 성취된 게쎄마니와 골고타로 이를테면 직행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가기 전에 우리는 게쎄마니와 골고타에서의 수난을 예언자답게 내다보고 있는 이 노래의 다음 구절들을 읽어봅시다. 고통받는 종은-이 점 또한 그리스도의 수난을 분석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이거니와-앞에서 언급된 고통들을 온전히 자발적으로 스스로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 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43)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해서 고통받으시며 죄없이 고통받으십니다. 당신이 고통을 받으심으로써 그분은 저 욥기에 의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근본적으로 표현되었고, 사람들에 의하여 누누이 제기된 질문을 받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나 비단 이 물음을 스스로 지니고 계실 뿐 아니라(더구나 그분은 욥처럼 한 인간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므로, 여기서는 이 물음이 훨씬 더 근본적인 물음이 된다), 이 물음에 대하여 있을 수 있는 최대의 답을 지니고 계십니다. 이를테면 이 대답은 질문이 구성되고 있는 내용 그 자체에서부터 솟아나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단 당신의 가르침, 곧 복음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이 복음의 가르침과 유기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합체되어있는 당신 자신의 고통에 의해서 고통에 관한 물음의 대답과 고통의 의미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이 가르침의 최종적 결정적인 말씀, 곧 장차 바오로 성인이 말씀하실 바와 같이 “십자가의 말씀”입니다.44)
이 “십자가의 말씀”은 옛예언에 표현되었던 표상을 참으로 생생하게 완성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공적으로 활약하며 가르치실 때의 수많은 일화들과 수많은 강론들이 처음부터 그분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뜻인 이 고통을 받아들이고 계심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게쎄마니에서의 기도야말로 여기서 하나의 결정적인 요점이 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45)라는 말씀과 그 다음의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46)라는 말씀은 여러모로 하나의 웅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하며 바치는 사랑의 진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당신 고통의 진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고통의 진실을 통한 사랑의 진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바로 깊은 차원에 있어서의 고통의 인간적 진실을, 즉 고통이란 인간이 그 앞에서 전율하며 악을 겪는 일임을 지극히 단순 명료하게 긍정해주고 있습니다. 무릇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게쎄마니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똑같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또한 외아들인 인간만이 경험하실 수 있는 이 비할 데 없이 유일하게 깊고 짙은 고통을 실증해주고 있습니다. 즉, 위에서 인용한 예언자의 말씀이 그 나름으로 우리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그런 깊이와 밀도를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완전히 이해하자면 우리는 그 주체의 신인적 신비를 꿰뚫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적어도 이 말씀에 힘입어 우리는 있을 수 있는 온갖 형태의 인간 고통과 신인의 고통과의 사이에 개재하는 차이를 (또 동시에 유사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게쎄마니라는 곳은 바로 이 고통이, 예언자가 고통 속에서 겪는 악에 관하여 표현한 모든 진실이 이를테면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영혼의 눈앞에 계시되고 있는 장소입니다.
게쎄마니에서의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골고타에서의 말씀은 고통 속에서 경험하는 악의 이 세계사상 유일한 깊이를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은 비단 구약성서에서, 특히 시편에서-구체적으로 이 말씀의 출처는 시편 21[22]이거니와47)-여러 번 나타나는 바와 같은 그런 버림받음의 표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버림받음에 관한 말씀은 이를테면 아들과 아버지와의 불가분의 일치관계라는 차원에서 생겨났으며 아버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기”48) 때문에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죄49)라는 바오로 성인의 말씀을 예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죄가 안고 있는 이 가공할 중대한 악─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섬이라는 ‘온전한’ 악─과 아울러, 아버지에 의한 배척이요,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외이며, 분리인 이 고통을 그리스도께서는 아들로서의 아버지와의 일치라는 하느님의 깊은 신비를 통하여 인간적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파악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바로 이 고통을 통해서 그분은 속량을 성취하시는 것이며,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이제 다 이루었다.”50)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서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고통받는 종의 노래에서 “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51)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과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섰습니다. 즉, 사랑─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사랑, 선을 창조하는, 고통을 수단으로 하여 선을 이끌어내는 바로 그 사랑─과 연결되었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구속이라는 최고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부터 이끌어내어지며 그 십자가에서부터 끊임없이 새삼 새출발을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생명수가 흐르는 강이 비롯하는 샘이 되었습니다.52) 그 속에서 우리는 또한 새삼 고통의 의미에 관한 물음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며, 또 그 속에서, 바로 그 깊은 샘에까지 이르러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V.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

19. 이사야서의 고통받는 종의 노래는 다음 구절에 의하여 바로 이 물음과 대답의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해주고 있습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그의 손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뭇해하리라.
나는 그로 하여금 민중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중을 전리품처럼 차지하게 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은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여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한 때문이다.”53)
그리스도의 수난과 더불어 모든 인간 고통이 새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욥이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있음을!”54)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마치 이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는 것과도 같았으며, 마치 자기 자신의 고통을 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구속이 없다할진대 그 고통의 의미가 그에게 그처럼 충만히 계시될 수는 없었겠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비단 구속사업이 고통을 통하여 성취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인간 고통 자체가 구속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으시면서도 “죄의 악 일체를” 스스로 짊어지셨습니다. 이 악의 경험이 비할 데 없을 만큼의 그리스도의 고통을 결정지었으며, 이 그리스도의 고통이 구속의 대가[贖錢]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이사야서의 고통받는 종의 노래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대에는 그리스도의 피로 봉인된 신약의 증언이 이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은이나 금 따위의 없어질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된 일이 아니라 흠도 티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얻은 것입니다.”55)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내시려고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56)고, 또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57) 하고 말씀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과 이와 비슷한 말씀들로써 신약의 증언들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통하여 성취된 구속사업의 위대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속자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인간 누구나가 구속사업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각자 모두가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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