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원리 > 교황문헌
6. 1985.03.31 전세계 젊은이들에게(Parati Semper[Dilecti Amici]) (0)
작성자 : 복음화위원회
등록일 : 2008.03.01 10:46
조회수 : 1439
이메일 :
홈페이지 :
전세계의 젊은이들에게
Parati Semper[Dilecti Amici]

국제 청소년의 해에 즈음하여
전세계의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교서



차 례

국제 청소년의 해에 전하는 소원
그리스도께서 젊은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젊음은 특별한 보화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물음
도덕과 양심에 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셨다"
"나를 따라라"
인생 계획과 그리스도교 성소
혼인의 위대한 성사
유산
역량과 과업
자아 교육과 위협
"성장"으로서의 젊음
미래의 거대한 도전
마지막 메시지
젊은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말씀


--------------------------------------------------------------------------------

사랑하는 벗들이여

국제 청소년의 해에 전하는 소원

1.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1)
이는 젊은이 여러분에게 드리는 본인의 권고입니다. 국제연합(UN)은 1985년을 국제 청소년의 해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여러분 자신들에게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연령층의 사람, 개인, 공동체, 사회 전체에 뜻 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근본 진리와 가치의 수호자이며, 동시에 인간과 위대한 인류 가족이 바로 하느님 안에서 지니고 있는 영원한 운명에 대한 봉사자인 교회에도, 이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교회가 날마다 따라 걸어야 하는 근본적인 길이므로,2) 교회가 모든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절인 청소년기에 대하여 특별한 중대성을 부여하는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 여러분들은 그러한 청춘을 구현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국가와 사회의 젊음이며 모든 가정과 온 인류의 젊음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교회의 청춘입니다. 우리는 모두 여러분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덕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모두 다시 젊어지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젊음은 여러분 자신만의 것이 아니며, 여러분의 개인적인 소유나 한 세대만의 자산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청춘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거쳐가는 모든 영역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속해 있는 특별한 소유입니다. 젊음이란 바로 인류 자체의 소유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미래에 속해 있고, 미래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언제나 미래로 이어지는 까닭에, 희망은 “미래의 행복”에 대한 기대입니다. 희망은, 그리스도인의 덕(德)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약속하신 저 영원한 행복에 대한 기대와 이어져 있습니다.3) 또한 이러한 희망은, 그리스도교적이고도 인간적인 덕행으로서, 섭리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발휘하여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기대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미래는 여러분 젊은이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치 그 미래가 한 때는 이제 어른들이 되어 버린 자들의 세대에 속해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 어른들과 더불어 미래가 오늘의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오늘의 현실, 그 현실의 모습과 여러 형태의 책임은 누구보다도 먼저 기성 세대에 있습니다. 아직은 미래에 놓여 있으나, 어느 날엔가 여러분 자신들과 더불어 현실로 다가설 무언가에 대한 책임은 바로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미래가 여러분에게 속해 있다고 말하며, 우리는 인생 무상의 범주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미래를 향한 여정입니다. 미래가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도덕적인 책임의 요구에 따라 윤리적인 범주 안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책임은 우리가 인간 개인에게, 그리고 그 개인으로 구성되는 공동체와 사회에 대하여, 인간적인 행위, 결의, 약속과 지향의 근본 가치를 부여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은 또한 그리스도교적이고 인간적인 희망이 지니는 고유한 차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원에서, 젊은이들에게 바쳐진 올해에 교회가 본인의 입술을 빌리어 젊은이 여러분에게 전하는 가장 첫째가는 바람은 바로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4)


그리스도께서 젊은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 언젠가 베드로 사도께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셨던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복음사가들이 전하는 그리스도와 젊은이의 대화5)를 묵상해 보면, 아마도 우리는 이러한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성서 본문들 가운데서, 이 이야기는 특별히 이러한 관점에서 상기해 볼 만한 대목입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는 물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런 물음으로 대답하십니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남을 속이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 한 계명들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6) 이러한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가운데에서 주요 계명들을 그 질문자에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대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젊은이가 이렇게 외쳤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그리고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7)
바로 이 순간에, 그 만남의 분위기는 돌변하고 맙니다. 복음사가는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8)고 적어 놓았습니다.
나자렛의 예수님께서 젊은이를 만나는 복음서의 다른 이야기들도 있기는 합니다. 특히 야이로의 딸9)과 나인에 사는 과부의 아들10)을 죽음에서 살려 내신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이야기한 그 대화가 가장 완벽하고도 내용이 풍부한 만남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이 시대를 넘어선 보편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 이야기가 어떤 의미에서는 세대와 세기를 넘어 지속적이고도 일관된 유익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젊은이들에게 소년 소녀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대화는 세계 도처에서 여러 나라, 인종, 그리고 다양한 문화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말씀을 건네실 것입니다.
동시에, 그 만남을 묘사하는 모든 요소와 그 대화에서 오고 간 모든 말씀은 매우 본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또 특별한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에 관한 진리 그리고 무엇보다 젊음에 관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을 위하여, 참으로 중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 교서에서 주로 복음서의 이 대목에 나오는 이 만남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아마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와 자신의 대화, 곧 젊은이들에게 본질적이고도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그리스도와 나누는 대화를 전개해 나가기가 더욱 수월해질 것입니다.


젊음은 특별한 보화입니다

3. 복음서의 이 대목 끝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그 젊은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갑니다.
재산이 많았다는 이 표현은 분명히 그 젊은이가 소유하고 있거나 상속받은 물질적 재산에 관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일부 사람들의 처지이지 전형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음사가의 말씀은 그 문제를 또 다른 방향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곧, 어떠한 물질 재화와도 관계 없이, 젊음 그 자체가 인간의 보화이며, 젊은 남녀들의 특별한 보화라는 사실에 대한 물음입니다. 흔히, 젊은 사람들은 특별한 보화로서 젊음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자주 이러한 말씀을 드렸지만, 언제나 똑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젊음을 보화로서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은 까닭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따로 이야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인생의 이 특별한 시기에 체험하는 귀중한 보화로서, 젊음을 생각하여야 하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객관적인 이유들입니다. 젊음이란 유년 시기와 분명히 구별되는 시기이며, 정확하게 말해서 유년 시절을 벗어난 때이며, 또한 완전히 성숙한 시기와도 구별되는 것입니다. 젊음의 시기는 특별히 인간 “나”에 대한 강렬한 발견의 시간이며, 인간 “나”에 관한 고유한 속성과 능력을 발견하는 때입니다. 젊은 남녀들의 인격 발달을 깊이 응시해 보면, 저 독특하고도 유일무이한 구체적인 인간성의 가능태가 단계적으로 차츰차츰 보입니다. 말하자면, 거기에는 미래의 인생 계획 전체가 새겨져 있습니다. 인생 자체가 그러한 계획의 성취, 곧 “자기 완성”으로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자연히 여러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젊음이라는 보화 자체는 바로 이러한 형태와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젊음은 발견하는 보화입니다. 동시에 계획하고 선택하고 앞을 내다보며 최초의 결단을 내리는 보화입니다. 그 결단은, 엄밀히 말해 인간 실존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단들입니다. 또한 이러한 결단들은 사회적으로도 대단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그 젊은이가 바로 이러한 실존의 국면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나누는 대화에서 그 젊은이가 묻는 물음으로부터 우리는 이를 미루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요를 뜻하는 “거대한 소유”는 바로 젊음 그 자체인 보화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젊음의 보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을 그리스도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입니까? 복음사가는 분명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서 본문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오히려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결심은 분명히 그 젊은이가 소유하였던 외적인 부요(“재산”)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가 누구인가 하는 점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바로 젊은이였다는 사실, 곧 젊음 안에 감추어진 내적인 보화가 그를 예수님께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그 보화가 또한 인생 전체의 계획에 가장 분명하게 관련되는 그러한 물음을 제기하도록 그를 강요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나의 인생이 완전한 가치와 온전한 의미를 지니게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벗들이여,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젊음은 바로 이러한 물음에서 드러나는 보화입니다. 인간은 자기 일생을 통하여 이러한 물음을 스스로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사람들은 이러한 물음을 특히 절박하게 참으로 집요하게 제기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또 좋은 일입니다. 이러한 물음들은 인격의 역동적인 발달을 보여 주고, 여러분의 나이에 적합한 역동성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물음들을 흔히 성급하게 자문하고 있으나, 동시에 그 물음들에 대한 답변이 졸속하거나 피상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구체적이고도 결정적인 무게를 지녀야 합니다. 그것은 여기에서 인생 전체에 관한 답변, 인간 실존의 전부를 포용하는 답변을 요구하는 물음이 됩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들은 여러분의 세대에서 유년 시절 이래 고통에 짓눌려 살아온 젊은이들이 특별한 방법으로 제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체적인 결함이나 장애 또는 어려운 가정 형편이나 사회적인 처지로, 고통당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또한 그들의 정신이 정상적으로 발달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삶의 가치와 의미에 관한 물음은 더욱더 근본적인 것이 됩니다. 또한 바로 그 첫머리부터 실존의 고통으로 점철된 물음인 까닭에, 매우 비극적인 물음이 됩니다. 전세계 도처의 젊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러한 젊은이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여러 나라와 사회와 수많은 가정에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느끼게 할 수 있는 어떤 낙인이 찍혀, 어려서부터 특수 교육 기관이나 병원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의 젊음 또한 하나의 내적인 보화라고,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문제를 우리는 누구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까? 그들은 이러한 근본 문제를 누구에게 물어야 하겠습니까? 여기에서 물어 보아야 할 적임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 어느 누구도 전적으로 그분을 대신할 수 없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4.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서에 나오는 그 젊은이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그 젊은이가 무엇을 물었던가는 우리가 이미 들었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나의 삶이 의미와 가치를 지니겠습니까? 우리는 그 젊은이의 물음을 우리 시대의 언어로 옮겨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답변은 이런 뜻이라 하겠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가치의 궁극적인 토대이시다. 그분께서만 우리 인간 실존에 대한 궁극의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선하시다는 뜻은 이렇습니다. 모든 가치는 그 최초의 원천과 궁극의 완성이 오직 하느님 한 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11)이십니다.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가치의 정통성과 그 최종 확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하느님을 언급하지 않고는-창조된 가치의 세계 전체는 ‘절대 공허’에 머물고 맙니다. 그 세계는 또한 그 의미와 명료성을 잃게 됩니다. 악이 선인 것처럼 제시되고, 선 그 자체는 배척을 당합니다. 가치 판단과 인식과 행동의 한계 밖으로 하느님을 쫓아 내 버린 곳에서, 바로 이 시대의 체험으로, 우리는 이를 보고 겪어 오지 않았습니까?
왜 하느님만 선하신 분이십니까?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말씀 안에서 무엇보다도 당신의 일생과 죽음의 증거로써, 이렇게 답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12)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13) 때문에 바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야기해 온 대로, 삶의 가치, 인생의 의미에 관한 물음은 젊음이 지니는 독특한 보화의 일부를 형성합니다. 이는 책임을 지고 성취시켜야 할 인생 계획과 관련된, 젊음의 풍요와 고뇌 바로 그 한가운데서 나오는 물음입니다. 젊음이 개인적인 고통으로 시험을 당할 때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깊이 깨닫게 될 때에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세계 안에 존재하는 온갖 죄악을 목격하고 크나큰 충격을 받을 때, 결국 죄의 신비, 인류 죄악의 신비14)(mysterium in iquitatis)에 직면하게 될 때에, 삶에 관한 물음이 터져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오직 하느님만이 사랑이시다. 이 말씀은 난해한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그러나 동시에, 확고하고도 진실한 대답입니다. 결정적인 해답을 그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나의 젊은 벗들이여, 여러분이 가능한 한 가장 인격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내적인 길을 찾아, 이를 받아들이고 성취하게 되도록 본인은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젊은이와 대화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분이십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러한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 그분께서는 묻습니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사실, 내가 선하다는 것은 하느님을 증언하는 까닭이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15) 스승이요 친구이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16)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여러분 젊은이들이, 여러분 안에 있고 여러분의 젊음에 뿌리박고 있는 보화를 통하여, 그분께 묻는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변의 근본 요지입니다. 여러분의 젊음은 여러분 앞에 여러 가지 전망을 펼쳐 놓습니다. 하나의 과업으로서, 여러분에게 인생 전체에 대한 계획을 제시합니다. 여기에서 가치에 관한 물음이 나옵니다. 바로 여기에 인생의 의미에 관한 물음, 진리와 선악에 관한 물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하시는 당신의 답변에서 이 모든 물음을 하느님께 여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분께서는 동시에 여러분 안에 있는 그 물음의 원천과 토대가 무엇인가를 여러분에게 보여 주십니다. 바로 창조 행위를 통하여,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모습이 된 까닭입니다.17) 하느님을 닮은 바로 이러한 모습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물음들을 제기하게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 없이 인간 자신을 이해할 수 없고 또 하느님을 떠나서는 자기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이러한 물음들이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 전부에게 이를 깨우치시고자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인간에 관한 진리의 이 근본 차원은 어둠 속에 묻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세상에 왔고’18)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19)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물음

5. 내가 무엇을 해야 나의 인생이 가치를 지니고 의미를 갖겠습니까? 이 진지한 물음은 복음서가 전하는 젊은이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현대인들이 여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 실존의 지평이 세계와 현세의 진보로 꽉 들어차 있는 세대가 아닙니까? 우리는 주로 지상의 범주 속에서 생각합니다. 또한 지구상의 경계를 넘어서, 우리는 우주 비행선을 발진시키고, 다른 혹성들에 신호를 전하고, 그 별들을 향해 우주선을 보내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은 현대 문명의 내용이 되어 왔습니다. 과학 기술은 물질에 관한 인간의 가능성들을 무수히 발견해 왔으며 또한 인간의 사상과 역량, 풍조와 열망 등 내부 세계를 지배하는 데에도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또한 분명합니다.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 머무를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젊음의 물음들을 털어놓을 친구가 될 때에, 우리는 그 젊은이와 다른 물음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그 외의 물음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충분하고도 본질적인 것이 못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상에서 삶의 길을 보여 주는 오로지 “선하신 선생님”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하느님 안에서 지니는 인간의 궁극 운명에 대한 증거자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불멸성에 대한 증인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입으로 선포하신 복음은 파스카의 신비 안에서 십자가와 부활로써 결정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합니다.”20) 당신의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인간을 인도할 능력이 없는 모든 계획 앞에서 끊임없이 “반대를 받는 표적”21)이 되어 오셨습니다. 참으로 이 죽음의 경계에서, 그러한 계획들은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인간의 모든 물음을 침묵시켜 버립니다. 이러한 모든 계획, 여러 가지 세계관, 여러 가지 이념들을 앞에 두고, 그리스도께서는 변함없이 거듭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2)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사랑하는 자매들이여,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고 그분께서 증언하신 모든 진리를 받아들이고자 원한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한편으로 “세상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23)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여러분은 이 “세상”을 꾸미고 있는 매혹적인 현실과 그 모든 풍요에 대하여 내적인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겠다고 결심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24)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사라져 가는 세상에 매여 있습니다. 가시적인 세상의 차원에서, 인간은 죽는 날을 바라보며 태어납니다. 동시에, 그 실존의 내적 근거가 자신을 초월하게 되는 인간은 또한 그 자신 안에 세상을 초월하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비록 세상에 뿌리박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 안에서 세상을 초월하는 그 모든 것은 태초부터 인간성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습을 통하여 설명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세상을 초월하게 하는 그 모든 것은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물음을 정당화시켜 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 물음을 절대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영역만이 아니라 그 밖에서도, 오랫동안 사람들이 자문해 왔던 물음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복음서에 나오는 그 젊은이처럼,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물음을 던지는 용기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전망으로부터, 곧 영원한 생명의 전망으로부터 현세적 실존을 이해하도록 가르쳐 줍니다. 영원한 생명이 없다면, 모든 면에서 아무리 부요하고 고도로 발전되었다 하더라도, 현세 실존이란 결국 피치 못할 죽음의 필연성 외에는 아무것도 인간에게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이제, 젊음과 죽음은 정반대가 됩니다. 죽음이란 젊음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이 또 그렇습니다. 그러나 젊음이란 인생 전체의 계획을 뜻하는 것이므로, 의미와 가치의 판단 기준에 따라 세워지는 계획이므로, 젊은 시절에 또한 종말에 관한 물음을 제기한다는 것은 절대 필요한 일입니다. 인간의 경험 그 자체는 성서의 말씀처럼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25)이라는 똑같은 말을 합니다. 영감을 받은 그 성서 저자는 덧붙여 말합니다.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26)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7) 복음서의 그 젊은이처럼, 그리스도께 물으십시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도덕과 양심에 관하여

6.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고 대답하시며, 십계명 중에 있는 계명들을 열거하십니다. 모세는 어느 날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계약을 맺으시던 순간에,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28)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날이 지켜 가야 하는 일상 생활의 지침이었습니다.29) 그리스도께 말씀드리던 그 젊은이는 당연히 그 십계명을 환히 외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30)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젊은이 한 사람 한 사람과 나누시는 대화에서,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느냐?”고 하시는 똑같은 질문이 되풀이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야 합니다. 계명은 하느님과 인류가 맺은 계약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 질문은 틀림없이 거듭될 것입니다. 계명은 행동의 근본 토대를 규정하며, 인간 행위의 도덕적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계명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인간의 소명, 사람들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여야 하는 인간의 소명과 본질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명확한 도덕 법전은 하느님 계시의 말씀 안에 새겨져 있으며, 시나이 산의 십계명 판에 그 요지가 담겨 있고, 복음서 안에서 곧 산상 설교31)와 사랑의 계명32)에서 그 정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도덕 법전은 또 다른 형태로 새겨져 있습니다. 도덕률은 인간의 양심 안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계명을 모르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계시하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들 자신이 율법의 구실을 합니다.”33)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던 성 바오로 사도는 즉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율법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증인이 됩니다.”34)
여기서 우리는 여러분의 젊음과 그 젊음으로부터 떠오르는 인생 계획에서 극히 중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 계획은 이를 세우는 진실된 행동을 통하여 무엇보다 먼저 영원한 생명의 전망을 받아들입니다. 이 진실된 행동은 도덕률의 이중 제시, 곧 모세의 십계명 판과 복음서에 새겨진 도덕률 그리고 인간의 양심 안에 새겨진 도덕률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성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양심은 도덕률에 대한 “증인으로서 자신을 내세웁니다.” 이러한 양심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말씀대로, “서로 고발도 하고 변호도 하는”35) “투쟁하는 이성”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말씀들이 우리의 내적 실재에 얼마나 밀접하게 일치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렸을 때부터 양심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젊은이와 나누는 대화에서,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남을 속이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고 한 계명들을 예수님께서 열거하실 때에,36) 올바른 양심은 인간의 대응 행위에 대하여 서로 고발도 하고 변호도 하는 내적인 반응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도덕률의 근본 원리는 어떤 종류의 상대주의나 실리주의 때문에 불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젊은 벗들이여!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의 그 질문자에게 하셨던 대답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도덕적 의식 상태를 여러분에게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께서는 여러분의 양심 상태를 여러분에게 묻고 계십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핵심적인 근본 물음입니다. 바로 젊은 시절에 형성되어야 하는 인생 계획 전체를 중시하는 사람들, 젊은이 여러분의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전 인생 계획의 가치는 여러분 각자와 도덕적 선악의 관계에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획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여러분 양심의 올바름과 올곧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양심의 감수성에 달려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여기 극히 중대한 순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 고유의 차원에서 순간 순간마다 그리고 영원히 만나게 되는 중대한 계기입니다. 인간 고유의 차원이란 바로 양심의 차원이며 도덕 가치의 차원입니다. 양심은 시간과 역사의 극히 중대한 차원입니다. 역사란 어떤 의미에서 “외부로부터” 일어난 사건들만으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내부로부터” 기록되는 것이므로, 그것은 인류 양심의 역사이며 도덕적 승패의 역사입니다. 또한 인간의 본질적인 위대성은 여기서 그 근거를, 곧 진정한 인간 존엄성을 발견합니다. 이는 내적인 보화입니다. 인간은 이로써 영원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단 한번 죽게 마련”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선악의 증거인 양심의 보화를 지니고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거룩함 그 자체이신 분 앞에서, “그 뒤에 심판을 받게 되는”37) 인생 전체에 관한 결정적이고도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양심 안에서, 곧 인간 행동의 내적인 진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떤 의미로, 거기에는 언제나 영원한 생명의 차원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바로 그 양심은, 도덕 가치를 통하여, 모든 세대의 인생 위에 그리고 인간의 환경, 사회, 국가 모든 인류의 문화와 역사 위에 가장 분명한 검인을 찍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셨다”

7. 그리스도와 젊은이의 대화를 계속 고찰해 볼 때, 우리는 이제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것은 새롭고도 결정적인 것입니다. 그 젊은이는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는 물음에 대하여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대답은 그 시점까지 그가 걸어온 인생 여정 전체에 일치하였습니다.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도 모두 이제까지 걸어온 인생 여정이 그리스도의 대답과 일치하는 것이기를, 본인은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본인은 여러분의 젊음이 여러분에게 확고한 원칙의 건실한 토대를 마련해 주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양심이 이 젊은 시절에 성숙한 혜안을 얻어, 여러분 모두 일생 동안 언제나 ‘양심의 인간’, ‘원칙의 인간’,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인간’ 다시 말해서 믿을 수 있는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형성된 도덕적 인격으로, 여러분은 공동체 생활, 가정, 사회, 직업 활동에 중대한 공헌을 할 수 있고, 또한 문화적·정치적 활동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 극히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으며, 여러분이 이미 관련되어 있거나 언젠가 연관을 가지게 될 모든 영역에서 막중한 공헌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서 인간의 온전하고도 심오한 정통성에 관한 문제가 되며, 또한 인간의 진정한 인격 발달에 관한 문제입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이러한 인격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모습으로 독특한 성격을 형성하고, 또한 그 인격은, 동시에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정과 더불어 시작되는 다양한 환경의 공동체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느 모로든, 무엇보다 자신이 누구인가에 따라, 공동체의 풍요에 이바지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의 “인격적” 보화인 젊음이 나아가는 방향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을 곧 자신의 인간성을 자기의 고유한 내면 세계로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사는 존재의 구체적인 영역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십계명과 복음의 계명들은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며, 특히 사랑의 계명은 인간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마음을 열게 해 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하는”38) 완덕의 끈입니다. 사랑을 통하여, 인간과 인간의 형제애는 더욱 충만한 성숙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까닭에, 사랑은 가장 위대한 것이며,39)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사랑은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40) 그리고 그 사랑 안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감싸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젊음이 나아가는 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여러분이 그분 앞에서 여러분 양심의 증언으로써 이러한 복음의 도덕률을 확인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세대에 걸쳐 고귀한 정신을 지녔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도덕률의 가치에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섰던 것입니다.
인류의 온 역사를 통하여 내려온 이러한 사실들의 확인을 여기서 예시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상고 시대로부터 양심의 명령이 모든 인간을 객관적인 도덕 규범으로 이끌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 도덕 규범은 자신이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원칙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41)
우리는 여기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객관적인 도덕을 이미 깨닫고 있습니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는, 도덕은 “마음 속에 새겨져 있고” 또한 “양심이 그(도덕의) 증인이 됩니다.” 하고 선언하십니다.42) 그리스도인은 창조하시는 말씀이 모든 인간을 비추어 주시는 그 빛을 기꺼이 도덕 안에 받아들입니다.43) 또한 그리스도인은 바로 사람이 되신 그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므로, 더욱 높은 복음의 율법으로 올라서게 됩니다. 복음의 법은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의 계명 안에서, 남이 자기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 모든 선을 이웃에게 해 주어야 하는 의무를 명백하게 부과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여, 내면에 있는 양심의 소리를 확인합니다.
이는 또한 본인의 소망입니다. 여러분의 젊음과 여러분 앞에 놓여 있는 평생의 계획에서,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들을 통찰한 뒤에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셨다.”는 복음 말씀의 의미를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와 같은 시선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시선으로 여러분을 유심히 바라보시는 그 진실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을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십니다. 복음은 그 모든 단계에서 이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사랑의 시선”은 기쁜 소식 전체의 요약이며 총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의 기원을 찾으려면, 우리는 창세기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44)고 한 순간이 바로 그 시선의 기원입니다. 창조주의 그 최초의 시선은 복음서의 젊은이와 대화를 나누시던 그리스도의 시선에서 반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구속 희생과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이 시선을 확인하고 보증하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바로 이 구원의 희생을 통하여, 그 “시선”은 각별한 사랑의 깊이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구원자이시며 신랑이신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긍정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시는”45) 단 한 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나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또한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러한 시선을 발견하고 또 그 시선을 깊이깊이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어느 순간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 시선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순간에 그러한 체험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고통 속에서, 또는 복음서에 나오는 그 젊은이의 경우처럼 순수한 양심의 증언과 더불어, 아니면 그 정반대의 상황에서 양심의 가책과 죄 의식과 더불어, 이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스승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을 때, 그 타락의 순간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46)
인간은 이러한 사랑의 시선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으며,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어 영원히 사랑을 받고 있다47)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 영원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시선으로서 한평생 인간과 함께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모욕을 당하고 짓밟힐 때, 다시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우리의 인간성이 말살된 것으로 보일 때, 그 시련과 굴욕과 박해와 좌절의 순간에, 아마도 이 영원한 사랑을 가장 강렬하게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한 순간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언제나 당신 아들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깨달음은 우리 인간의 전 실존을 받쳐 주는 견고한 지주가 됩니다. 만사가 우리를 우리 자신과 우리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불신하게 할 때에, 그리스도의 이러한 시선, 곧 어떠한 죄악이나 파멸보다도 훨씬 강하다는 것이 그분 안에서 입증된 사랑의 깨달음, 바로 이러한 의식이 우리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여러분을 위한 본인의 소망은, 복음서에 나오는 그 젊은이가 체험하였던 것을 여러분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시었다.”


“나를 따라라”

8. 복음서의 본문을 살펴볼 때,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고 하는,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왔다는 젊은이의 그 순간까지의 인생 증언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이 바로 이러한 사랑의 시선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동시에, 이 “사랑의 시선”은 그 대화의 결론 국면으로 들어서는 도입부였습니다. 마태오가 전하는 이야기에서는, 그 결론의 단계로 들어서는 사람이 바로 젊은이 자신이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그 때까지의 모든 생활에서 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인격적인 충실성을 선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는 새로운 물음을 제기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48)
이 물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도덕적인 양심, 나아가 자신의 전 생애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바로 젊은이의 도덕적인 양심 안에, “그 이상의 무엇”에 대한 열망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열망은 여러 가지로 드러나며, 우리는 또한 우리의 종교와는 거리가 먼 듯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비그리스도교, 특히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를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는 수천 년 동안 무수히 많은 “영적인 인간들”이 있었으며, 물질적인 것의 허상을 초월하는 절대자를 찾아 청빈하고 청정하게 살고자 흔히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던 사람들이 있어 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완전한 해방의 경지에 이르고자 분투하였으며, 사랑과 신뢰를 지니고 하느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았으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감추어진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그들의 정신 속에서 들리는 신비스러운 내면의 소리에 재촉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반향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49) 그분의 말씀은 또 더욱 위대하고 영속적인 것을 추구하라고 인도합니다.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50) 그들은 정신을 정화시키기 위하여 고행을 하고 온 힘을 다해 목적을 추구하였으며, 때로는 그들의 삶을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은총으로 승화시키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표양이 되고,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찰나적이고 때로는 모호한 가치를 넘어서 영원한 가치의 우월성을 바로 행동으로써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 완전함에 대한 열망의 명확한 언급은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산상 설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십계명 판을 중심으로 한 모든 도덕률을 확인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계명들에 새롭고도 복음적인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계명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은총인, 사랑을 중심으로 그 모든 계명이 모아집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51)
이 새로운 맥락에서,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 설교가 시작되는 여덟 가지 참 행복52)의 강령을 이해하게 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교 도덕률의 근본을 이루는 계명들은 일련의 복음적인 권고들을 통하여 완성됩니다. 그 권고들은 완전함 곧 거룩함으로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특별한 방법으로 표명하여 줍니다.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그 이상의 것”을 묻는 젊은이를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여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합니다. 인간은 그 내면에서, 성령의 손길에 의하여, 계명을 따르는 삶으로부터 은총을 깨닫는 삶으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이시는 사랑의 시선은 이러한 내적 “전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53)
사랑하는 나의 젊은 벗들이여,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차원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러한 차원은 계명으로 알려진 단순한 도덕적 의무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차원일 뿐만 아니라, “더욱 깊은” 차원이며 더욱 근본적인 차원입니다. 이는 우리가 젊은 시절에 세우기 시작하는 인생 계획에 관하여 더욱 완전한 표현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은총의 차원은 또한 모든 인간의 성숙한 면모를 만들어 주고, 나중에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성소를 창조합니다.
여기서, 본인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께서 그 젊은이에게 하셨던 말씀의 특별한 의미에 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에서 모든 세대의 젊은 질문자들 중 그 일부에게 그러한 말씀을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본인은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우리 세대의 젊은이들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은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성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직무 사제직에 봉사하도록 부름 받는 모든 소명의 발단에서 “나를 따라라.”54)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 사제직은 동시에, 라틴 전례의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의식적이고도 자유로운 독신의 선택과 이어집니다. 교회는 또한 수도 성소의 시작에서 “나를 따라라.”는 그리스도의 똑같은 말씀을 발견합니다. 수도 성소에서 한 남자나 한 여자는, 복음적인 권고(정결, 청빈, 순명)의 서약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 지상에서 살아가신 그리스도의 삶55)을 자신의 인생 계획으로 인식합니다. 수도 서약을 함으로써, 그러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특별히 증언하고,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영원하신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에 대한 소명을 증언하는 데에 투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 일부에게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를 예외적으로 증언하여야 하는 일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미 다른 곳에서 그리고 수많은 기회에56) 더 완벽하게 제시되었으므로, 이 교서에서 본인은 이를 간단히 언급하는 데 그치고자 합니다. 본인이 여기서 이를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젊은이의 대화 안에서 그러한 성소 특히 복음적인 청빈의 문제가 극히 명료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예외적이고도 카리스마적인 의미에서, “나를 따라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일반적으로 젊은 시절에 때로는 어린 시절에 들리는 까닭에, 본인이 여기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에서, 본인은 한 남자나 한 여자로서 인격 발달의 중요한 국면에 처해 있는 모든 젊은이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한 부르심이 여러분의 가슴 속에 다가설 때에, 그 부르심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 부르심을 성숙한 성소로 발전시키십시오!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고 기도하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추수할 것은 많고,”57) 또 “나를 따라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따라 사는 사제들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현대의 교회와 세계는 온 삶을 오롯이 하느님께 바치는 증거자들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를 현존하게 하고,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더욱 가까이 가져오는, 그리스도 자신의 배우자적인 사랑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필요합니다.
이제 본인에게 추수할 것이 많다는 데 대한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저 다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복음의 추수, 이 구원의 추수는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나 일꾼이 적습니다!” 이는 아마도 오늘날 특히 일부 국가에서 과거보다는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고 있으며, 또한 봉헌 생활을 하는 일부 수도회나 그와 유사한 단체에서도 역시 그러합니다.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58) 그리스도께서 계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특별히 우리 시대에, 더욱 많은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를 위한 기도와 행동 계획이 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교회가 여러분 젊은이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도 또한,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슴 깊은 곳에서 이러한 교회의 기도가 열매를 맺으려 할 때에, 스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나를 따라라.”


인생 계획과 그리스도교 성소

9. 복음서의 이 말씀은 분명히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씀은 우리가 더욱 광범하고도 근본적인 의미에서 성소의 문제를 한층 깊게 이해하도록 도와 줍니다.
여기에서는 여러분 각자가 젊은 시절에 그려 내는 인생 계획과 어느 정도 동일시되는 “삶”의 성소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소”는 “계획” 이상의 그 무엇을 의미합니다. 인생 계획에서, 내 자신이 바로 그 계획을 세우는 주체이며, 이는 여러분 각자의 실재적인 인격에 한층 더 부합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부르고 있는 요소들이 그 계획 안에서 자각되는 한, 이러한 “계획”은 하나의 “성소”입니다. 이 요인들은 대개 특별한 가치 질서(또한 “가치 체계”라고도 한다.)를 형성하며, 거기에서 젊은이들의 마음을 이끌어들이는 이상, 실현되어야 할 이상이 떠오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성소”는 하나의 “계획”이 되고, 그 계획은 또한 하나의 성소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 서 있고 또 그리스도와 젊은이의 대화에 나오는 젊음에 관한 묵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삶의 성소”에 대한 “인생 계획”의 그러한 관계는 더욱 분명하게 이야기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 존재는 하나의 피조물이며,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입양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젊은 시절에 자기 자신에게는 물론, 대답을 기대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 특히 자기 부모들과 교사들에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또한 자신의 창조주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도 그러한 물음을 제기합니다. 인간은, 무엇보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익히게 되는, 내면의 특별한 영역에 속하는 이러한 맥락에서 그 물음을 제기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께 묻고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나의 인생을 위한 당신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창조적이고도 아버지다운 계획은? 무엇이 당신의 뜻입니까? 나는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그 “계획”은 하느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의 과업으로 부여하시는 그 무엇으로서, “삶의 성소”라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젊은이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기도 속에서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누는 젊은이들은 창조주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그들 자신에 대하여 가지고 계시는 영원한 의도를 깨닫고자 열망합니다. 그러한 젊은이들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과업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자유에 맡겨져 있고 또한 동시에 내부와 외부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고찰한 다음, 젊은이들과 소년 소녀들은 자신의 인생 계획을 세우며, 그와 동시에 하느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 성소로서 이러한 계획을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 교서를 보내는 모든 젊은이 여러분에게, 하느님 앞에서 각자의 삶의 성소를 발견하는 일과 관련된, 이 놀라운 과업을 위탁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신명나는 과업입니다. 그것은 매혹적인 내면의 사업입니다.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면서, 여러분의 인간성은 발전하고 성숙하게 되며, 또한 여러분의 젊은 인격이 더욱 큰 내적 성숙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다른 사람들을 위하여-하느님을 위하여, 여러분이 마땅히 되어야 하는 그러한 사람이 되려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누구인가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삶의 성소”를 발견하는 과정과 병행하여, 이러한 삶의 성소가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성소”가 되는 방법이 점진적으로 더욱 분명하게 구현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성소”의 개념이 무엇보다 먼저 사제직과 수도 생활에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한 경우에 한하여 젊은이들에게 “나를 따라라.”는 복음적인 권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공의회는 사물을 보는 시야를 넓혀 주었습니다.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는 하느님 백성의 생활 안에서 그 독특한 특성과 성사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쇄신된 의식, 곧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삼중 직무(tria munera)인 예언자직, 사제직, 왕직에 보편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은, 또한 성화 성소의 보편성59)에 대한 의식으로서, 모든 인간의 삶의 성소는 그리스도인의 성소로서 복음적인 부르심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를 따라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느님이신 구원자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여러 길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길은 여러 가지입니다. 종말론적인 진리와 사랑의 나라를 증거함으로써, 또한 그뿐만 아니라 복음 정신에 따라 현세의 모든 현실을 변혁시키고자 분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습니다.60) 여기가 바로 그리스도인 성소의 본질과 분리될 수 없는, 평신도 사도직이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
이는 여러분 젊음의 근본적인 역동성에 부합되는 인생 계획에 서 극히 중대한 전제가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채울 삶의 구체적인 내용과는 별도로,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서의 그 젊은이에게 하셨던 말씀에 비추어, 인생 계획을 검토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또한 세례와 견진성사의 의미를 매우 깊이 있게 거듭 숙고하여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성사 안에,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소의 근본 유산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성체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시작됩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되는 충만한 성사적 은총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교회의 영성적인 풍요는 모두 이 사랑의 성사 안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또한, 언제나 성체성사와의 관계 안에서, 고해성사를 묵상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 형성에서, 고해성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중요한 성사입니다. 특히 내적 생활의 체계적인 교육인 영성 지도와 관련될 때에 그러합니다.
교회의 성사들이 젊음과 젊은이들에 대하여 해야 할 분명하고도 독특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지만, 본인은 이 모든 것을 간결하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본인은, 이러한 주제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 특히 청소년 사목을 맡고 있는 사목자들이 듣도록 위임하는 바입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11 1988.08.15 여성의 존엄(Mulieris Dignitatem) 복음화위원회 08.03.01 2488
10 1998.05.28 신앙의 옹호(Ad Tuendam Fidem) 복음화위원회 08.03.01 2276
9 1987.12.30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 복음화위원회 08.03.01 2586
8 1987.03.25 구세주의 어머니(Redemptoris Mater) 복음화위원회 08.03.01 2484
7 1986.05.18 생명을 주시는 주님(Dominum et Vivifican.. 복음화위원회 08.03.01 1510
6 1985.03.31 전세계 젊은이들에게(Parati Semper[Dilec.. 복음화위원회 08.03.01 1440
5 1984.12.02 화해와 참회(Reconciliatio et Paenitenti.. 복음화위원회 08.03.01 1335
4 1984.02.11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 복음화위원회 08.03.01 1429
3 1981.11.22 가정공동체(Familiaris Consortio) 복음화위원회 08.03.01 1476
2 1981.09.14 노동하는 인간(Laborem Exercens) 복음화위원회 08.03.01 1364
12
홈으로  |  로그인  |  개인정보취급방침  |  사이트맵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  관리자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