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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986.05.18 생명을 주시는 주님(Dominum et Vivificantem) (0)
작성자 : 복음화위원회
등록일 : 2008.03.01 10:46
조회수 :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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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하느님을 새롭게 발견하고자 열망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에 대한 신앙으로 인류가 회개하고 화해할 것을 촉구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회칙이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충동하시어,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그 구원의 원리로 삼으신 하느님의 계획을 온전히 실현하는 데 협조하게 하신다.

교회와 세상의 삶에서 성령에 관하여


교회와 세상의 삶에 있어서 성령에 관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회 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


머리말

제1부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시며 교회에 주어진 성령
1. 파스카 잔칫상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와 약속
2.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3.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다
4.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은이인 메시아
5. 성령 안에서 “나타나신” 나자렛 예수님
6.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7. 성령과 교회의 시간

제2부 세상의 죄를 밝히 드러내 보이시는 성령
1. 죄와 정의와 심판
2. 오순절날의 증언
3. 시작(한처음)에 관한 증언: 죄의 원초적 실재
4. 고통을 구원적 사랑으로 바꾸어주시는 성령
5. 양심을 깨끗이 하는 피
6. 성령을 거스르는 죄

제3부 생명을 주시는 영
1. 예수 그리스도 강생 후 2000년에 있을 희년의 주제: 성령으로 잉태되신 그리스도
2. 희년의 주제: 은총이 나타났다
3. 인간의 내적 갈등과 성령: 육체는 그 욕망에서 영과 대립하고, 영 역시 육체와 맞선다
4. 성령께서는 “내적 인간”을 굳게 하시러 오신다
5. 하느님과 맺은 내밀한 일치의 성사인 교회
6. 성령과 신부(新婦)는 말한다: “오소서!”

맺음말



존경하는 형제들과 친애하는 아들 딸들에게 인사 드리며
사도적 축복을 보냅니다.


머리말

1. 교회는 성령께 대한 그 신앙을 표현하면서, 그분께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 폴리스 신경(니케아 공의회〔A.D. 325〕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A.D. 381〕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신경)에서 선포되는 내용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 신령은 또 성령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고도 말합니다.

교회는 이런 말씀들을 신앙의 원천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습니다. 요한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초막절 축제에 예언하시고 약속하셨던 대로, 성령께서는 새로운 생명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 나올 것이다."1) 이어서 복음사가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살마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2)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실 때,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그 물"3)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장면에서나, 니고데모와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물과 성령으로 날 새로운 탄생"에 대해 언급하실 때4)에도 예수님께서는 물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고 오순절 체험과 사도 시대 역사를 겪으면서 체득한 바에 따라, 처음부터 성령께 대한 신앙을 선포했습니다. 이 때부터 교회는 성령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 하나이시며 삼위로서 그 깊이를 헤아릴 길 없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신을 건네주실 때 그 일을 가능하게 해 주시는 분, 이 인간들 안에 영원한 생명의 샘을 만들어 주시는 분으로 선포해 온 것입니다.

2. 교회가 끊임없이 고백해 온 이 신앙을 하느님의 백성은 그 의식 속에서 항상 새롭게 되살리고 더욱 깊이 뿌리내리게 해야 하겠습니다. 이 일은 한 세기 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촉구되어 왔습니다. 온전히 성령만을 논한 회칙 [신적 책무](1897)를 발표하신 레오 13세로부터, 회칙 [신비체](1943)에서 성령을 교회의 생명 원리로 제시하면서, 그분께서 신비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교회 안에서 활동하신다고 설명하신 비오 12세에 이르기까지 성령께 대한 신앙은 계속 재확인되었읍니다.5) 그리고 최근에 와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령께 대한 교리에 새로운 관심이 요청됨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대해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의회의 그리스도론, 특히 그 교회론에 이어 성령께 대한 새로운 연구와 신심이 계발되어야 하겠습니다. 공의회의 가르침을 보완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6)

이처럼, 오래되었으면서도 항상 새로운 교회의 신앙은 우리 시대에 와서 다시 한번 성령께 대한 우리의 태도를 새롭게 하고,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 그분께 대한 믿음을 쇄신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성령에 대한 교부들의 풍부한 가르침을 순수하게 간직해 온 동방교회와의 공동 유산으로부터 우리는 많은 도움과 힘을 얻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몇 해 안에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 중 아주 중요한 것의 하나로 우리는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1600주년 기념 행사를 꼽을 수 있는 것입니다. 1981년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로마에서 그 기념식이 있었던 바, 교회의 신비에 대해 묵상하는 장면에서 그 기회에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한 길을 열어주시는 분으로 더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또 성령께서는 하느님 자신에께서 오는 일치의 최상 원천으로 드러났는데,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를 인상적인 말로 표현하셨고, 교회는 이를 다시 성체성사의 전례에 받아들였습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빕니다."7)

앞서 반포한 본인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와 [자비로우신 하느님]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기본 의도에서 출발했고 영감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 회칙들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8) 또 "모두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기"9) 위하여, 아버지께 보냄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신 아들에 의해 성취된 우리의 구원을 경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하신 성령에 대한 본 회칙도 역시 같은 근본적 취지에서 마련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같은 흠숭과 영광을 받으시며, 신적 위격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자리잡으시고, 교회의 쇄신에서도 그 원천과 활력이 되십니다.10) 이 회칙은 지난 공의회가 남겨 준 유산의 가장 중요한 원천에서 나온 것입니다. 실상, 교회 자체와 세상 안에서 교회의 사명에 관한 공의회의 가르침을 전해 주는 문서들은 복음서, 교부학, 전례학 등의 연구를 통해 하느님의 성삼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우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 성삼 신비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로"라는 정식으로 흔히 표현됩니다.

교회는 이와 같이 함으로써, 오늘날의 사람들이 그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어떤 염원에 응답해 주고 있는 셈입니다. 다름 아니라, 무한한 영으로서 초월적 실체의 특성을 간직하신 하느님을 새롭게 발견하려는 욕구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제시하신 하느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현대인들 역시 "영과 진리 안에서"11) 그분께 예배 드리기를 갈망하고 있으며, 사랑의 비결과 "새로운 창조"12)를 위한 힘을 그분 안에서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과연 그분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인간 가족과 함께 그리스도 이후 2000년의 종결점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이 때, 교회는 성령을 선포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다시 한번 새롭게 깨닫고 있습니다. "잠시 지나갈 뿐인" 하늘과 땅에 비추어, "지나가지 않을 말씀들"13)이 특별한 무게를 지니고 있음을 교회는 잘 압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물"14)이 용솟음치는 샘이며, 진리이시고, 구원의 은총인 성령께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들이 바로 그런 말씀들입니다. 교회는 이 말씀들을 두고 묵상하며, 신앙인들과 모든 사람에게 이 말씀들을 상기시키는 한편, 그리스도교 역사가 이천년대에서 삼천년대로 넘어가는 대희년(大喜年) - 그때 가서 그렇게들 부르겠지만 -을 경축할 준비를 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부터 제시할 내용들은 성령에 대한 그 풍부한 가르침을 남김없이 살펴보자는 것이 아니고, 아직도 논의의 여지가 남아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일정한 답변을 제시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목적만을 추구하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교회를 충동하시어,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그 구원의 원리로 삼으신 하느님의 계획을 온전히 실현하는 데 협조하도록 하셨음"15)을 깨닫게 하자는 것입니다.


제1부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시며 교회에 주어진 성령

1. 파스카 잔칫상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와 약속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가 이르렀을 때, 그분께서는 사도들에게 “다른 파라클리토”를 보내주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16)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요한 복음사가가 기록하기를, 당신께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시기 전날에 베풀어졌던 파스카 잔칫상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주겠다. 그러면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다시 파라클리토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17) 이 진리의 성령을 예수님께서는 파라클리토라고 부르십니다. 파라클리토란 “위로자” “협조자” 또는 “변호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다른” 또는 두 번째 파라클리토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그분 자신께서 우선 첫 번째 파라클리토이시기 때문입니다.18) 그분께서는 과연 기쁜 소식을 가져다 주신 첫 번째 파라클리토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분 다음에, 또 그분을 통해 오시어 교회를 매개로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사업을 세상에서 계속 추진하시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성령을 통해 이어 나가시겠다고 거듭 밝히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떠나심, 곧 수난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 제자들을 미리 대비시키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인용할 말씀들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하나하나는 이 약속과 선언에 어떤 새로운 내용을 추가시키는 것들입니다. 동시에 이 말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말들이 같은 사건들을 지시하고 있다는 뜻만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비라는 관점에서도 이 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에서입니다. 실상 이 신비가 여기에서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대목은 성서 전체에서도 달리 없는 것입니다.

4. 위에서 언급한 말씀을 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다음 내용을 덧붙이십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께서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주실 것이다.”19) 이제 성령께서는 비록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의 스승으로서 사도들과 교회 한가운데에 계시면서 그들의 위로자가 되실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가르쳐주실 것이다.”라든지 “그분께서는 되새기게 해주실 것이다.”라든지 하는 표현은 그분께서 당신 특유의 방식으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영감을 계속 불어넣어 주시겠다는 뜻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지니는 참된 의미를 이해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라는 뜻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환경과 상황이 바뀌더라도 그것이 지니는 의미가 변질되지 않고 계속 살아있도록 지켜주시겠다는 뜻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령께서는 사도들이 스승께 들은 진리 자체가 교회 안에 고이 간직되도록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5. 기쁜 소식을 소식을 다음 세대에 넘겨 전달해 주는 일에서 사도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과 일치될 것이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20)
사도들은 직접 증인, 목격자들이었습니다. 복음사가 요한이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들은 스승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보기”까지 했습니다.21) 그리스도께 대한 인간적이고 직접적이며 “역사적”인 증언은 성령의 증언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시리라.” 사도들의 인간적 증언은 진리의 성령께서 해주시는 증언 안에서 최상의 버팀목을 발견합니다. 또 그 이후로도 계속 사도들의 증언은 세기를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신자들을 매개로 끊임없이 이어질 것인데, 이때 그 증언의 계속성을 내적으로 밑받침해 주는 역할을 성령의 증언이 떠맡게 될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인간에게 내려주신 최상의 완전한 하느님 계시임을 우리가 잘 아는 바이지만, 이를 알려주고 보장해 주며 사도들의 설교와 기록물들을 통해서 손상없이 전달해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성령의 증언입니다.22) 한편 사도들의 증언은 교회와 인류의 역사 안에서 그 인간적 표현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6. 이 모든 사실은 우리가 방금 살펴본 선언과 약속의 내용과 의도 사이에 있는 상관 관계에서도 드러납니다. 이 상관 관계는 또한 요한복음의 다음 말씀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주실 것이다.”23)
앞에서 본 말씀들 속에서는 예수님께서 파라클리토를 진리의 성령으로 제시하시면서, 그분을 “가르쳐주실 분”, “되새기게 해주실 분”, 당신을 “증언해 주실 분”으로 소개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분께서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시리라.”는 말씀은 사도들이 “지금은 알아들을 수 없다.”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고 계시던 순간으로서는 바로 임박해 있던 수난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자기비허(自己卑虛)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온전히 깨닫도록 이끌어주시리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걸림돌을 뛰어넘어,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24) 모든 것에까지 확대 적용된다는 사실 이후에 확실해졌습니다. 실상, 그리스도의 신비는 전체적으로 신앙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계시된 신비의 실체로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은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온전히 깨닫도록 이끌어주시는 일”은 신앙 안에서 또 신앙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며, 인간 안에서 수행하시는 그분의 역사(役事)가 이루어내는 결과입니다. 이 점에서, 성령께서는 인간의 최상 안내자요, 인간 정신을 비추는 빛이시어야 합니다. 이 말은 우선 사도들에게 해당됩니다. 목격 증인으로서 사도들은 이제부터,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 특히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또, 좀더 넓은 안목으로 볼 때, 모든 시대에 계속 이어질 스승의 제자들과 그분의 증인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야말로 인간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신비, 이 역사의 궁극적 의미를 밝혀주는 계시된 신비를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고 분명하게 선포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7. 그러므로 구원의 경륜 속에서 성령과 그리스도 사이에는 내밀한 끈으로 이어진 관계가 있습니다. 이 불가분의 관계로 성령께서는 인간 역사 안에 “다른 파라클리토”로 역사하시니, 나자렛의 예수님께서 계시하신 기쁜 소식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하고, 공간적으로 널리 전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신비와 활동 안에서 우리 구속주(救贖主)의 역사적 현존을 끊임없이 보장해 주시고 지상에서 그분께서 계속 함께 계시면서 당신의 구원 사업을 추진하게 해주시는 성령-위로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은 찬연히 빛납니다. 다음에 이어 나오는 요한의 말씀은 바로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분, 곧 성령께서는 나에게서 받은 것을 너희에게 열어 보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25) 이 말씀은 앞에서 언급한 바를 다시 한번 확인해 줍니다. “그분께서는 가르쳐주시리라. …… 그분께서는 일깨워 주시리라. …… 그분께서는 증언해 주시리라.” 하느님께서 스스로를 열어 보여주시는 최고의 완전한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거니와 - 사도들의 설교가 이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 그것은 교회 안에 보이지 않는 파라클리토, 진리의 성령을 파견하심으로써 계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성령의 파견이 그리스도의 파견과 얼마나 긴밀히 맺어져 있고, 그것이 얼마나 이 그리스도의 파견에서 전적으로 흘러 나와 역사 안에서 그 구원의 열매를 무르익게 하고 발전시키는지를 표현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받는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분께서는 나에게서 받은 것을 너희에게 열어 보여주시리라.” 예수님께서는 마치 이 “받는다”라는 말을 설명해 주시고, 신적이고 삼위적인 원천의 단일성이 밝히 드러나게 하려는 의도에서인 듯이,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나로부터 받은 것을 너희에게 열어 보여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26) “나로부터 받은 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받으실 것”이라는 이 표현의 의미를 거울삼아,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일 전날 만찬 석상에서 성령에 대해 하신 다른 말씀들의 의미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그분께서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 그분께서 오시면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27) 이 말씀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다음으로 미루기로 합니다.

2.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8. 요한복음 본문의 특징은 거기서 아버지, 아들, 성령이 모두 확연히 위격(位格)들로 소개되며, 아버지는 아들이나 성령과 구분되고, 또 세 위격이 서로 구분되는 것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파라클리토에 관해서 언급하실 때 계속 인칭 대명사인 “그”를 사용하시고, 동시에 고별사에서 그분께서는 아버지, 아들, 파라클리토를 상호 관계 안에서 하나로 이어주는 끈을 밝혀주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 아버지로부터 오시며”,28)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주십니다.”29)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주시고”,30) 성령께서는 아들을 “증언하십니다.”31) 아들은 아버지께 성령-파라클리토를 보내달라고 청하시는데,32) 다른 한편으로는 십자가를 통한 당신의 “떠남”을 넌지시 비추시며,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33)고 선언하시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는 아버지로서의 당신 권능으로 아들을 보내시듯이 성령을 보내십니다.34) 그러나 동시에 그분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속의 힘으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성령께서는 아들에 의해 보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눈여겨보아 두어야겠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하신 다른 약속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신 다음에 오실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는 데 비해서, 요한복음 16,7-8의 말씀은 이 두 분의 출현 사이에 어떤 의존 관계가 있음을 함축하고 이를 뚜렷이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이 둘 사이에 어떤 인과 관계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가면 너희에게 그분을 보내겠다.”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떠나심과 밀접히 관련되는 일이었습니다. 성령의 오심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업 다음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구속 사업 때문에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9. 이처럼 파스카 축제 석상의 고별사 속에서 우리는 성삼에 관한 계시의 정점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결정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들과 말씀들을 만나게 되는 순간을 바로 앞두고 있는데, 이 말씀들은, 사도들을 선교 임무를 띠워 파견하고, 그들을 매개로 하여 교회를 같은 목적으로 파견하는 대파견 행위로 이어집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라.” 이 선교 파견은 세례의 성삼적 정식(聖三的 定式)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35) 이 정식은 하느님의 내밀한 신비를 반영합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께서 삼위의 신적 생명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별사를 이 삼위일체적 정식으로 이끌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준비 단계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이 삼위일체적 정식 속에서 하나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 생명에의 참여를 실현시켜 주는 성사의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잘 표현됩니다. 이 성사가 인간에게 초자연적 선물로서의 성화 은총을 부여해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은총을 통해 측량할 수 없는 하느님의 생명에 초대되고 그 생명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10. 당신의 내밀한 생명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36) 그분께서는 본질적인 사랑으로, 이 사랑은 세 신적 위격들에 공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영으로서 위격을 지닌 사랑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되지 않은 사랑-선물로서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심연 깊이까지를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37) 우리는 하나이며 셋이신 하느님의 내밀한 생명이 성령 안에서 온전히 선물로 되고, 신적 위격들 사이에 상호적 사랑의 교환이 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선물이라는 양식으로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자기증여(自己贈與), 사랑으로 존재하는 일의 위격적 표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38) 그분께서는 위격이신 사랑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위격이신 선물이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에게서 위격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의 문제를 두고 실재의 헤아릴 길 없는 풍부함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이 풍부함을 어떤 언어로써도 표현해 낼 길이 없고, 계시만이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동시에, 성령께서는 신성에서 아버지와 아들과도 본질을 같이하시면서 사랑이요 창조되지 않은 선물이신데, 이 사랑을 원천(살아있는 샘)으로 피조물들에게 부여되는 모든 선물(창조된 선물)이 흘러 나옵니다. 말하자면, 창조 행위를 통해 모든 것에게 존재를 선사하고, 구원경륜 전체를 통해 인간들에게 은총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께서 기록하신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39)

3.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다

11. 파스카 잔칫상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고별사는 특별히 이 “증여”, 성령의 이 “자기증여”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 들어있는 구원 신비의 가장 깊은 “논리”가 드러나 보입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이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상호간의 표현할 수 없는 친교의 연장으로서의 구원 신비를 의미합니다. 성삼의 신비를 출발점으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세상의 구원의 신비로 이끄는 것은 일종의 신적 “논리”입니다. 인간의 현세적 역사 속에 아들이 이루어놓으신 구속은, 십자가를 통한 그분의 “떠남”과 부활을 통해서 성취된 것인데, 그것은 동시에 그 모든 구원 능력과 함께 성령께로 넘겨지게 되었습니다. “나에게서 받을”40) 그분이신 성령께로 인계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떠남”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성령을 “보내시는 일”과 그 오심을 위해서 불가결한 조건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말씀들은 동시에 그때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자기증여가 성령 안에서 시작된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12. 첫 번째 시작에 비해서 이것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첫 번째 시작은 하느님께서 처음에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주신 일로서 그것은 사실상 창조의 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 마디에서부터 우리는 이런 말씀을 발견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 그리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영(ruah Elohim)이 떠돌고 있었다.”41) 이 성서적 창조 개념은 우주에 존재를 주어, 있게 하는 일, 곧 존재의 부여만을 뜻하지 않고 또한 창조물 안에 하느님의 영이 임재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만드신 것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그들에게 주시는 일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보다도, 당신의 모습을 따라 당신을 닮게 창조하신 인간에게 해당됩니다. “우리 모습을 따라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42) 여기서 창조주께서 스스로에 대해 사용하신 복수형 동사 “만들자”는 말은, 어떤 의미로 벌써 성삼의 신비를 넌지시 비추고 인간의 창조에 성삼께서 임재하셨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신비를 이미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말씀을 읽을 때는 그 안에서 그 신비의 흔적을 인정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창세기의 문맥을 살펴볼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인간 창조 안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주시는 일의 첫 번째 시작을 식별해 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모습”을 따라 당신을 “닮도록” 창조해 주신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13. 예수님께서 고별사에서 하신 말씀들도 이 옛날의 “시작”, 창세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된 이 근본적 시작과 관련지어 이해해야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떠남”을 성령 내림의 조건으로 제시하심으로써,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성령 안에 자기증여를 새로 시작하시는 일과 구속의 신비 사이를 연결하십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첫 시작과 인간의 전역사 사이에 원조의 타락 이래 죄가 끼여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죄는 하느님의 영께서 창조물 안에 임재하시는 일을 저지하며, 무엇보다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주시는 일을 방해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바로 이 죄악 때문에 “창조물이 …… 헛된 것에 예속되어 있고 ……, 그날까지 모두 신음하며 산고를 겪고 있다.”고 기록하시고, 또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도 쓰고 계십니다.43)

14.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44)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의 “떠남”에는 구속의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하느님의 영께서 새롭게 피조물 안에 현존하시게 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성령 안에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주시는 일을 새로 시작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바오로 사도께서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45) 최후의 만찬 석상의 고별사에서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영이십니다. 그와 동시에, 사도들 특히 다르소의 바오로께서 증언하시는 바와 같이, 그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기도 합니다.46) 바오로께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 마음속에” 이 영을 보내심으로써 “피조물이 간절히 기다리던” 그것이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떠남”을 대가로 지불해야 오십니다. 이 “떠남”이 사도들 마음속에 슬픔을 주었고,47) 성금요일의 수난과 죽음에서 그 슬픔은 절정에 이르렀지만, “이 슬픔은 곧 기쁨으로 변할 것”이었습니다.48) 실상, 그리스도께서는 후에 구속적 가치를 지니는 당신의 “떠남”을 부활과 아버지께로의 승천이라는 영광으로 꾸미셨던 것입니다. 스승의 “떠남”을 앞두고 사도들이 느꼈던 슬픔, 그러나 그 “떠남”을 통해서 다른 “파라클리토가 오실 것이기에”49) “그들을 위해서 더 유익한” 그 떠남을 사도들은 겪어내지 않으면 안되었고, 실상 그들의 슬픔 속에서도 기쁨은 살아있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구속이 성취되는 장소인 십자가를 대가로 지불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파스카 신비의 능력에 힘입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오순절 축일에 오시어 사도들과 함께 머무르셨습니다. 사도들과 함께 머무르심은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 머무르시기 위함이었으며, 그것은 다시 교회를 통하여 세상 안에 머무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성령 안에, 인간과 세계의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스스로를 주시는 이 증여 행위가 결정적으로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4.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은 이인 메시아

15. 메시아의 사명(missio, 使命, 보냄)이 끝까지 수행될 수 있는 것도, 그 메시아께서 하느님의 백성과 인류 전체를 위해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란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볼 때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받은이”라는 말입니다. 구원의 역사에서는 이 말이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은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구약성서 시대의 예언자적 전통 속에서는 이 말이 그런 의미로 통했습니다.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시몬 베드로가 한 말도 그런 배경을 가지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비롯하여 온 유다지방에 걸쳐서 일어났던 나자렛 예수에 관한 일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성령으로 축성해 주시고 그 힘으로 그분을 채워주셨습니다.”50) 베드로의 이 말씀들과 또 이와 비슷한 다른 말씀들51)로부터 우리는 더욱 거슬러 올라가 무엇보다도 이사야 예언자에게까지 되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서를 흔히 “제5복음” 또는 “구약성서의 복음”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후에 신약의 계시가 예수님과 같은 인물로 해설하게 될, 어떤 신비스런 인물의 내림에 대해 예언하면서, 그의 인물과 사명을 하느님 영의 어떤 특별한 행위, 주님 영의 어떤 행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주님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주님을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
그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는다.”52)

이 대목은 구약성서의 성령론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은사적 숨결”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던 구약성서의 “영”이라는 개념과, 하나의 위격자, 선물, 위격자에게 주어지는 선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성령”이라는 개념 사이에 들어서서, 이 두 개념을 이어주는 역할을 이 성서 대목이 맡아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 가문에서(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나타날 메시아는 주님의 영이 “그 위에 내릴” 바로 그이입니다. 이 단계에서 벌써 파라클리토의 계시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무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에 와서 확연히 계시될 성삼 신비의 일치 속에서의 성령에 관한 계시가 장차 올 메시아의 모습을 은근히 비추는 이 대목에서 그 길이 트여가고 있음은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16. 그 길이 바로 메시아이십니다. 구약에서는 ‘기름부음받은 일’이 영을 주는 일을 외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상징으로 쓰여졌습니다. 이에 비해, 메시아께서는(구약의 어떤 기름부음받은이보다도 더) 하느님 스스로 기름부으신 유일하고 위대한 기름부음받은이이십니다. 하느님의 영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라는 뜻에서 그분이야말로 기름부음받은이이십니다. 그뿐 아니라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 영을 백성 전체에게 주는 일을 중개해 주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다음 말씀에서 이 사실이 드러납니다.

“주 하느님의 영을 내려주시며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주님께서 우리를 반겨주실 해,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53)
기름부음받은이는 또 “주님의 영과 함께” 보냄을 받습니다. “이제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과 함께 나를 보내셨다.”54)
이사야서에 의하면, 기름부음받은이, 주님의 영과 함께 보냄을 받은 이는, 또 하느님의 영이 그 위에 머무르는 주님의 선택된 종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나는 그 위에 나의 영을 주었다.”55)
다 아는 바와 같이, 이사야서에서는 주님의 종이 참된 고통의 사람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죄를 위한 고통받는 메시아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56) 그와 동시에, 그는 온 인류에게 구원의 참된 열매를 가져다 줄 사명을 받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뭇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주리라. …….57) “그는 또 백성의 계약, 뭇민족의 빛”58)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기”59)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한가 하는 데 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영을 너에게 불어넣고, 나의 말을 너의 입에 담아준다.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히 너의 입과 너의 자손의 입과 대대로 이어질 자손들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60)

여기에서 인용한 예언서의 대목들은 복음 성서를 길잡이로 하여 이해하여야 합니다. 또 신약성서 쪽에서도 이 구약성서의 구절들로부터 대단히 귀중한 빛을 얻어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를 성령 안에 오시는 분, 성령을 충만히 소유하시는 분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성령을 자기 안에 충만히 소유하시는 것은 동시에 다른 이들을 위해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민족, 온 인류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충만히 받으면 여러 가지 선물, 구원을 위한 재화들이 같이 따라옵니다. 이런 선물들과 재화들은 특히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 이 선물에 마음을 여는 이들, 흔히 자신의 삶에서 겪은 쓰라린 체험을 통해 그 마음이 열린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내적 자세를 갖춘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거기에 있었던 “의롭고 신심 깊은 노인”, “성령이 그 위에 머물던” 시므온은, 이런 사실을 그 순간에 직관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서 “만민에게 마련된 구원”을 보았는데, 다만 그것이 큰 고통,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와 함께 겪지 않으면 안될 십자가의 고통과 같은 어려움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사실을 미리 내다보았던 것입니다.61) “성령으로 잉태한”62) 동정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마음속 깊이에서 메시아의 “신비들”에 대해 묵상할 때 이 모든 이치를 누구보다도 더욱 잘 깨달으셨습니다.63) 그 신비들에 자신이 깊이 연결되어 있었기에 그 깨달음은 한층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17. 우리는 여기서 미래의 메시아 위에 “머물게 될” 그 “주님의 영”이 무엇보다도 그 주님의 종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으로서는 스스로 존재하는 어떤 독립된 위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그분의 결정과 선택에 따라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의 관계 구절에서 빛을 받아, 주님의 종인 메시아의 구원 업적이 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영의 작용임을 암암리에 비추기는 하지만, 구약성서 구절의 본래 문맥에서는 하느님 안에 서로 구분되는 주체(主體)나 위격이 있음을 신약성서에서 계시되고 성삼 신학에서 문제되는 식의 자존적 위격 개념과 같은 식으로 - 시사하는 요소는 아직 없습니다. 이사야서든 구약성서 전체로든 간에 성령의 위격성은 완전히 숨겨져 있었습니다. 유일한 하느님 계시에 있어서나 장차 오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자들의 말에 있어서나 그 사실이 숨겨져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8.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아로서의 활동 벽두에 이사야의 말을 포함하는 이 말씀이 당신을 두고 한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 곁에서 목수인 요셉의 집에 30년 동안이나 사신 바로 그 나자렛 동네에서 그런 선언을 하고 나섰다는 사실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회당에서 말씀하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분께서는 이사야서를 펴시고 다음의 말씀이 나오는 대목을 발견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발라 축성하셨기 때문이다.” 이 대목을 읽으신 다음 그분께서는 회중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64) 이런 방식으로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아버지의 “기름부음받은이”요, 메시아임을 고백하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하느님 자신의 자기증여인 성령께서 머무르시는 바로 그 사람이며, 이 영을 충만히 소유한 사람, 영 안에서 하느님이 인류에게 자신을 주시는 그 “새로운 시작”을 도입시키는 그 장본인임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5. 성령 안에서 “나타나신” 나자렛 예수님

19.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는 메시아로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성령 안에서의 그분의 메시아적 사명은 그분의 공적 활동 시초에 이미 세례자 요한에 의해 백성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인 요한은 요르단 강가에서 메시아의 내림을 알리며 참회의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머지않아 성령과 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께서는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65)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그리스도를 성령 안에서 “오시는” 분으로뿐 아니라 성령을 “지니시는” 분으로 선언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께서 더욱 잘 계시해 주실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에게서 미래에 관계되는 말들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르단 강변에서 펼친 그분의 가르침 속에서는 그 말들이 새로운 메시아적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도입의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언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였던 것입니다. 그가 선언하는 것은 모든 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나자렛 예수님 역시 참회의 세례를 받기 위해 요르단 강으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요한은 선포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6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성령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며,67) 이런 식으로 그는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나자렛 예수의 구속적 사명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말한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이사야 예언자가 사용한 “주님의 종”이라는 표현에 못지않게 중요한 구속자의 정체 표현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당신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신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변에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의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메시아로 드러나시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기름부음받은이로 인정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증언은 세 공관 복음에 언급된 또 하나의 상급 증언에 의해 보강되었습니다. 다름아니라,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고,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은 후 기도를 하고 계실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 위에 내려오셨다.”68)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69)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성삼적 신현(聖三的 神顯)으로서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받으심을 보여주는 증언이었습니다. 이 신현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확인해 줄 뿐 아니라, 메시아로서의 나자렛 예수님께서 지닌 더욱 깊은 차원의 진리를 열어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아께서는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장엄한 서임(敍任)은 “주님의 종”의 메시아적 사명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르단 강에서의 신현 사건으로 우리는 메시아 위격의 신비 자체가 고양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목소리는 “내 아들”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20. 나자렛 예수님의 활동은 모두 성령의 현존 안에서 진행되지만, 요르단 강의 신현은 그분의 신비를 순간적으로 밝혀주는 데 불과했습니다.70) 이 신비는 예수님 자신에 의해 계시될 것이었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과 가르치심”71)을 통해서 조금씩 확인될 것이었습니다. 다락방에서 행하신 고별사에 이르기까지도, 같은 방향으로 가는 이 가르침과 메시아적 표지들 속에서, 우리는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계시 과정상 특별한 중요성을 띠는 사건들과 말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복음사가 루가는 전에도 예수님을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으로 또 “성령의 인도로 사막에 가셨던 분”으로 제시한 바 있지만72) 이제는 우리에게 또 다른 사실을 전해 줍니다. 스승께서 자기들에게 맡기셨던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온 72명의 제자들73)이 자기네 활동의 성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기뻐하고 있을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충동으로 기쁨에 마음이 설레여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7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 때문에 기쁨을 느끼셨습니다. 그분께서 기뻐 용약하신 것은 당신 스스로 하느님께서 아버지 되심을 계시할 수 있는 능력을 받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기뻐하신 것은,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아버지이심이 특별히 “작은 사람들”, “어린이들”에게 잘 전달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사가는 이 모든 것을 “성령 안에서 기쁨에 마음이 설레이는 일”로 묘사했습니다.
기쁨에 그토록 마음이 설레이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이 아시고 또 아버지가 누구신지는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75)

21. 요르단 강에서 있었던 신현에서는 말하자면 “밖으로부터”, 위로부터 왔던 것이, 여기서는 “안으로부터” 곧 예수님의 존재의 가장 깊은 속에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 안에 일치되어 있는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과 자신의 아들 됨에 관해서만 언급하시고, 사랑이시며 아버지와 아들 간의 일치인 성령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분께서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자신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은 자기 안에 계신 성령의 충만에서부터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 그분의 마음을 채우시고 그분의 “자아”에까지 깊이 침투하시며, 그분의 행동 속 깊이 활력을 불어넣으시고 영감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성령 안에서 기쁨에 마음 설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성령과 완전히 일치해 있음을 잘 의식하고 계신데, 그 일치가 “기쁨에 설레는 마음”으로 표현되고, 이 기쁨이 어떤 의미로는, 그분의 감추어진 출원(出源)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줍니다. 거기서부터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 특유의 영광스런 현현과 기쁨의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아들과 그리스도-메시아의 인간성은 하느님 아들의 위격에 속하고, 신성에서는 성령과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을 고백함으로써 자기 자신, 신적 “자아”를 드러내십니다. 그분께서는 “같은 본질을 가진” 아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만이 아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고, 아들만이 아버지가 누구신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령으로 사람이 되셨고, 마리아라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던 것입니다.

6.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2. 루가는 그의 이야기로써 다락방의 고별사에 나타나는 진리와 대단히 가까운 지점에까지 우리를 인도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쁨에 고양되신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그때의 고별사와 기타의 말씀 속에서, 자신이 영을 “지니는” 분이라고 소개하며, 또 십자가를 통한 당신의 “떠남”을 대가로 지불하고 사도들과 교회에 그분을 “주는” 분으로 제시하십니다.
여기서 “지니다”라는 동사를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계시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창세기를 비롯하여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영을 우선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숨결”로 이해하도록 했습니다. 초자연적인 “생명의 숨결”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그 영이 메시아라는 분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선물”, 그를 안으로부터 충동함으로써 기름부음받은이의 전체 구원 활동을 인도하기 위해 그에게 오는 어떤 것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르단 강변에서는 이사야의 예언이 하나의 구체적 형태를 취해 나타났습니다. 곧,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오시는 분, 당신의 위격에 주어진 선물처럼 그를 지니시는 분, 당신의 이러한 인간성으로 그 선물을 나누어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분께서는 성령과 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76) 루가복음서 안에서는 성령에 관한 이 계시가 재확인되고 한층 더 풍부하게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삶과 활동의 내밀한 원천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하신 고별사의 내용에 비추어, 성령께서는 새롭고 더욱 넓게 계시되었습니다. 그는 한 위격자(메시아라는 분)에게 주어지는 어떤 선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이 하나의 위격인 선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내림을 “다른 협조자”의 내림으로 선포하시는데, 그분께서는 진리의 영으로서 사도들과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실 것이었습니다.77)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일치되어 상호 소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나에게서 받은 것을 너희에게 열어 보여주실 것이다.”78) 이 일치는 아버지 안에 그 원천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79) 성령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셨으며 그분에 의해 보냄을 받으셨습니다.80) 성령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메시아에 관한 예언들을 성취시키기 위해 사람이 되신 아들에 대한 선물로서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그리스도이신 아들의 “떠남”에 바로 뒤이어 성령께서 직접 오시어 - 그것이 성령의 새로운 사명인데 - 아들의 일을 완성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완성하실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23. 우리는 지금 파스카 사건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선물이신 하나의 위격으로서의 성령에 관한 계시가 새롭게 또 결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이 순간입니다. 파스카 사건들 -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 - 은 파라클리토와 진리의 영으로서의 성령께서 새롭게 오시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구속자 그리스도의 행위를 통해 성령 안에서 당신 스스로를 인간에게 주시는 그 증여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순간입니다. 이 새로운 시작은 세상의 구속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기”81) 때문입니다. 아들을 “주셨다”라고 하는 그 일 자체를 통해, 무궁무진한 은총의 원천이시며 사랑이신 하느님의 가장 깊은 본성이 표현됩니다. 아들을 주시는 그 선사 행위 안에서 계시가 완성되고 영원한 사랑의 너그러움이 더없이 완벽하게 실현됩니다. 신성(神性)의 헤아릴 길 없는 깊이 안에서 ‘위격자-선물’인 성령께서는 아들의 일, 곧 파스카 신비를 통해 그렇게 되셨거니와, 그 성령이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들과 교회에 주어지고 그들을 매개로 하여 전인류와 세상에도 주어졌습니다.


24. 이 신비는 부활날에 결정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날, 바오로 사도가 기록한 대로,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나자렛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셨습니다.”82)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현양”이 부활로써 그 정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그분은 “권능을 충만히 지닌” 하느님의 아들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 권능은 성삼의 측량할 수 없는 원천으로부터 분출되는 것인데, 이것은 무엇보다도 다음의 사실로 드러나 보입니다. 곧, 한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예언자의 입을 빌려 하느님께서 이미 하셨던 약속을 실현하십니다. “내가 너희 안에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로운 영을 불어넣어 주리라. …… 나의 영을 너희 속에 넣어주리니 …….”83) 다른 한편,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사도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실현해 주십니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리라.”84)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가 부활하신 분의 모습을 닮도록 하기 위해서 보내주신 분이 바로 진리의 영, 파라클리토이십니다.85)
성서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예수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86) 요한복음의 이 핵심적인 대목이 지니는 의미를 세부적으로까지 이해하려면, 파스카 사건들의 서두에 같은 다락방에서 들려주셨던 말씀들과 대조하여 이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야흐로 지금부터 이 사건들이 - 아버지께서 축성하시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의 성삼일(聖三日) - 완성의 단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과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 위에서 “숨(영)을 내놓으신” 그리스도87)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 사도들에게로 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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