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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988.08.15 여성의 존엄(Mulieris Dignitatem) (0)
작성자 : 복음화위원회
등록일 : 2008.03.01 10:49
조회수 : 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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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해에 즈음하여 발표한 여인의 존엄과 소명에 관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서한



여성의 존엄

MULIERIS DIGNITATEM

1988년 8월 15일


마리아의 해에 즈음하여 발표한
여인의 존엄과 소명에 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서한


차례


I. 서 론

II. 여인 -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

III. 하느님 모상과 닮은꼴

IV. 하와 - 마리아

V. 예수 그리스도

VI. 모성 - 동정

VII. 교회-그리스도의 신부

VIII. "이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IX. 결 론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아들딸들에게 건안을 빌며 사도적 축복을 보내 드린다.



I. 서 론


시대의 징표


1. 여성들의 존엄(Mulieris Dignitatem)과 소명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끊임없이 반성하는 주제로서 특히 최근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왔다. 예를 들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여러 가지 관련 문서들 가운데 교회 교도권의 발언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발언들을 끝맺는 자리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나온다. "여성들의 소명이 완전히 인정되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고 또 실제로 도래하였다. 이제 여성들은 세상에서 자신들이 여태까지 획득한 적이 없었던 지대한 세력과 영향력과 능력을 행사하고 있다. 따라서 인류가 매우 심각한 변화를 겪고 있는 이 시기에 복음의 정신으로 무장된 여성들이 인간성의 상실을 막는 데에 대단한 공헌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이 메시지는 이미 공의회의 가르침, 특히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과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에 선포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생각이 공의회 이전에 벌써 표명된 적이 있었는데 교황 비오 12세의 담화문들과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같은 문헌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엔 본인의 선임자 바오로 6세가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에게 "교회의 박사" 칭호를 부여할 때 이 "시대의 징표"의 중요성을 보여 주었다. 같은 취지 아래 그는 1971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에서 요청한 바에 따라 "여성들의 존엄과 책임의 효과적인 증진"에 관한 당대의 문제들을 연구하기 위하여 "특별 위원회"를 구성했다. 바오로 6세는 한 담화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어떤 종교들 안에서보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여성들은 처음부터 특별한 존엄성을 가졌다. 이 여성의 존엄에 관한 여러 가지 중요한 측면들은 신약 성서에 잘 나타나 있다. 여성들은 분명히 그리스도교의 일상적이고 실제적인 제도 안에서 매우 중대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지만 그들의 온갖 잠재적 역량이 아직 선명하게 부각되지 못했다."
최근(1987년 10월)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20년의 교회와 세계에 있어서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을 주제로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참석한 교부들은 한번 더 여성들의 존엄과 소명에 대해 다루었다. 그들이 제안한 사항 중 하나는 여성됨과 남성됨의 의미와 존엄성에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인류학적이고 신학적인 근거들을 더욱 깊이 연구하자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인간됨이 항상 한 여성으로서만 또는 한 남성으로서만 실존해야 한다는 창조주의 결정에 대해 그 이유와 결과를 숙고하자는 것이다. 오직 여성의 존엄과 소명의 위대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이 인류학적 신학적 근거들로부터 출발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교회와 사회 안에서의 여성들의 능동적인 현존을 규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본인은 바로 이러한 주제를 이 문헌에서 다루고자 한다. 앞으로 출판될 예정인 "세계주교대위원회의 후속 권고"는 교회와 사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대한 사목적 성격을 규정하고 적절한 제안들을 표명할 것이다. 여성의 사목적 역할에 대해서는 이미 교부들도 몇 가지 중대한 생각들을 천명한 바 있는데, 이는 전세계의 여러 지역 교회들에 소속된 평신도(남성과 여성 모두)들의 증언들을 심사 숙고한 결과이다.


마리아의 해


2. 지난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에서 지적한 것처럼 본 주제에 특별한 관심을 나타낸 마리아의 해에 개최되었다. 이 회칙은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제8장에 포함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현시점에 비추어 발전시킨 것이다. 제8장의 제목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의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 마리아 - 성서의 "여인"(창세3,15;요한2,4;19,16 참조) - 께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에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계시며, 따라서 교회의 신비 안에서도 특별한 방법으로 현존하신다. "교회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의 성사요 전인류의 일치의 성사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교회의 신비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어머니의 특별한 위치는 이 "여인"과 전체 인류 가족 사이의 "예외적인 연결"에 대하여 깊은 통찰을 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이 문제는 모든 남성과 여성의 문제요 인류의 모든 아들딸들의 문제이다. 인류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인간성 전체에 속하고 성서적 "시작"의 신비에 연결된 근본적인 유산을 실현시키고 있다 :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창세 1,27).
인간됨 곧 남성됨과 여성됨에 대한 이 영원한 진리 - 인간의 체험 안에 변함없이 고정된 진리 - 는 동시에 "육화되신 말씀 안에서만 밝혀지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인간 자신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고 인간이 높이 불리었음을 열어 보임" 안에 그리스도의 어머니셨던 저 "여인"께 특별한 자리를 마련해 드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복음 안에 포함된, 그리고 신·구약 성서 전체의 근저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교회와 사람들에게 여성들의 존엄과 그 소명에 대해서 마땅히 많은 언급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본문헌 전체를 지배하는 일관된 사상적 흐름이다. 본문헌은 그리스도 탄생 2천년대를 마감하고 3천년대를 시작하려는 이 시기에 마련한 마리아의 해의 전체적인 맥락과 부합된다. 그래서 본인으로서는 본문의 문체와 성격을 하나의 묵상집으로 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느낀다.



II. 여인 -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


하느님과의 일치


3.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인의 몸에서 나게 하셨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4,4)에 실린 이 말씀으로써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안에 예정된"(에페 1,9 참조) 신비를 완전하게 드러내는 결정적인 순간과 방법을 함께 연결시킨다. 아들 곧 아버지와 실체에 있어서 하나이신 말씀이 "때가 차"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 되신다. 이 사건은 구세사의 관점에서 볼 때 지상의 인간 역사에서 "전환점"을 이룬다. 이것을 깊이 갈파한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그분의 본이름"마리아"로 부르지 않고 "여인"이라고 부른다 : 이것은 창세기(3,15 참조)에 실린 "첫 복음"의 말씀과 일치한다. 그분은 "때가 참"을 표시하는 구원의 중심적 사건 안에 등장하는 저 "여인"이시다. 이 사건은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실현된다.
바로 여기서 구세사의 중심적 사건, 핵심적 사건인 주의 빠스카 신비가 시작된다. 아마도 이 사건은 보편적인 인간 영성의 역사 안에서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영성의 역사는 여러 세계 종교들 안에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말씀을 상기해 보자. "사람들은 어제도 오늘도 인간의 마음을 번민케 하는 인생의 숨은 수수께끼들의 해답을 여러 가지 종교에서 찾고 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선이 무엇이고 죄는 무엇인가? 고통의 원인과 목적은 무엇인가? 진실한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는가? 죽음은 무엇이고 죽은 후의 심판과 징벌은 어떨 것인가? 마침내 우리 자신의 기원이자 종착역이며 우리의 실존을 에워싸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마지막 신비는 과연 무엇인가? "고금을 통하여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는 사물의 변화와 인생의 역사 속에 현존하는 심오한 힘을 어느 정도 느껴왔다. 때로는 최고의 신이나 아버지를 긍정하였다."
하느님의 추구, 때로는 "더듬어 찾는"(사도17,27 참조) 추구를 증언하는 이와 같은 폭 넓은 종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바오로의 편지에 등장하는 "때가 참"이라는 표현은 하느님 자신의 응답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는"(사도 17,28 참조) 바로 그 하느님이시다. 이 하느님께서는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브 1,1-2). 아버지와 본체로서 하나시며 "여인의 몸에서 나신" 사람으로서의 아들의 파견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의 정점과 그 계시의 결정적 계기를 의미한다. 이 자기 계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또 다른 가르침대로 구원적 성격을 띤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인자와 지혜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당신 성의(聖意)의 비밀을 알게 하셨으며(에페 1,9 참조), 이로써 인간은 육화되신 말씀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고 천주성에 참여하게 되었다"(에페 2,18; 2베드 1,4 참조).
이 구원의 사건 한복판에 한 여인이 등장한다. 삼위 일체 안에서 온전히 하나로 결합되신 하느님의 자기 게시는 나자렛에서의 수태 고지에 잘 요약되어 나타난다. "보라,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되는 것이 없다"(루가 1,31-37)
이 사건을 이스라엘 역사의 무대에서 쉽게 조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 역시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의 딸이다. 다른 한편 이 사건은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질문들에 직면한 인간의 다양하고 줄기찬 탐구의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나자렛의 수태고지에서 "인간의 마음이 느끼는 불안을 진정시키고자" 하느님 친히 주시는 결정적 응답의 시작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느님의 응답은 단순히 예언자들을 통하여 계시된 그분의 말씀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말씀이 실제로 사람이 되신"(요한 1,14 참조)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마리아께서는 인간의 머리로 도저히 상상하고 기대할 수 없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얻어내신다. 이 일치는 온 이스라엘, 특히 선택된 백성의 딸들의 기대조차도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딸들은 예언자들의 약속을 근거로 그들 주의 하나가 어느 날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어느 누가 감히 약속된 메시아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일 것으로 상상할 수 있겠는가? 구약 성서의 일신론적인 신앙의 배경에서 이런 발상은 상상키 어려웠다. 마리아께서는 오직 당신을 "감싸신" 성령의 힘에 의해서만 "사람에겐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한"(마르 10,27 참조)일을 받아들이실 수 있었다.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


4. 따라서 "때가 참"이라는 표현은 그 "여인"의 예외적인 존엄성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으로 이 존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하여 초자연적으로 고양되는 것을 말하는데, 바로 이 고양이야말로 지상에서나 영원에서나 인간적 실존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저 "여인"께서는 전인류의 대표시요 원형이시다. 그분은 남자와 여자를 통털어 모든 인간에게 속한 인간성을 대표하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자렛 사건은 "여인" 마리아께만 유보될 수 있는,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독특한 일치를 강조한다. 곧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나사렛의 동정녀께서는 진실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처음부터 인정한 이 진리는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장엄하게 선포되었다.10) 마리아께서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실뿐이라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이 공의회는 동정녀 마리아의 모성의 본질적인 의미를 강조하였다. 수태 고지 때에 자신의 수락(fiat)을 통하여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아버지와 본체가 하나이신 한 인간을 잉태하신다. 이로써 그분은 하느님의 참 어머니가 되신다. 왜냐하면 그분의 모성은 단지 아들의 몸이 아니라 위격 전체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칭호는 동정녀 마리아께 허락된 하느님과의 일치에 부합되는 이름이 되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의 특별한 일치는 모든 인류(filii in Filio)에게 주시기로 초자연적으로 예정된 아버지와의 일치를 가장 탁월한 방법으로 실현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치는 순수한 은총이요 성령의 선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마리아께서는 믿음의 응답을 통하여 당신의 자유로운 여성적인 "자아"를 충분히 실현시키신다. 자신의 긍정적 응답(fiat)을 통하여 마리아께서는 하느님과의 일치에 있어서 진정한 주체가 되신다. 마리아께서 이루신 하느님과의 일치는 본체로서 아버지와 하나이신 말씀이 육화되는 신비 안에서 실현되었다.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모든 행위는 인간인 "나"의 자유로운 의지를 언제나 존중한다. 나자렛에서 일어난 수태 고지도 예외가 아니다.


"섬기는 것은 다스리는 것"


5. 이 사건은 분명히 상호 인격적인 특성을 지닌다. 그것은 대화이다. 우리가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사와 마리아 사이에 오간 대화 전체를 "은총이 가득하신"이라는 표현에 연결시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수태고지 대화 전체가 그 사건의 본질적인 차원, 곧 초자연적인 차원을 계시한다. 은총은 자연을 제쳐놓거나 제거시키지 않고 오히려 완성시키고 승화시킨다. 나자렛의 동정녀를 "하느님의 어머니"의 위칠 올려놓은 "은총의 충만함"은 "여성의 특성" 및 "여성적인 것"을 온전히 완성시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여성의 인격적 존엄의 정점을 발견하게 된다.
마리아께서 천사의 메시지에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라고 응답하실 때, "은총이 가득하신" 그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에 대하여 인격적으로 응답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신다. 그래서 그분은 "이 몸은 당신의 종입니다."(루가 1, 38)하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의 깊은 의미를 외면하거나, 인위적으로 그 의미를 사건 전체의 맥락에서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에 대해서 게시된 총체적 진리에서 분리시킴으로써 본 의미를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주님의 종"이라는 표현 속에서 마리아께서는 자신이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완전히 인정하신다. 수태고지의 대화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종"이라는 표현은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 전체에 각인되어 있다. 사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 아버지와 본체를 같이하시는 이 "아들"께서는 때때로 당신에 관해서, 특별히 당신의 사명을 스스로 설명하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 45).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당신이 " 하느님의 종"이라는 의식을 갖고 계셨는데, 이는 예언자 이사야가 그의 메시아 사상을 피력할 때 사용한 호칭이다. (이사야 42,1 : 49,3.6:52,13 참조).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명의 본질적인 내용, 곧 세상의 구속자라는 사명의식도 모성을 갖게 되시는 첫 순간, 다시 말해서 "아버지께서 그를 통하여 세상을 구하시려고 보내신"(요한 3,17 참조) 아들과 일치하시는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봉사 안에 자신의 위치를 정하신다. 바로 이 봉사가 그 곳에서는 "섬기는 것이 다스리는 것이 되는" 하느님 나라의 기초를 이룬다."하느님의 종"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의 왕적 존엄성을 보여 주실 것이다. 이 존엄성을 보여 주실 것이다. 이 존엄성은 인간 개개인의 소명에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여인 -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주제를 숙고함으로써 지극히 합당한 방법으로 마리아의 해에 관한 묵상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주제는 동시에 여성들의 존엄과 소명에 대한 반성의 본질적 지평을 마련해 준다. 우리가 여성들의 존엄과 소명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이 지평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 모든 인간의 존엄과 이 존엄에 연관된 소명은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그 결정적 척도를 발견해야 한다. 성서의 여인, 마리아께서는 이 존엄과 소명을 가장 완전하게 구현하신 분이다. 아무튼 하느님의 모상과 모습에서 벗어나서는 충만함을 누릴 수 없다.



III. 하느님 모상과 닮은꼴


창세기


6. 성서의 "시작"에로 눈을 돌려보자. 그곳엔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 꼴"로 계시하고 있는데, 바로 이 진리가 모든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의 확고한 기초를 이루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창세기 1,27). 이 대목에 다음과 같은 인간학의 근본적 진리가 들어 있다. 인간은 가시적인 세계의 모든 창조 질서에서 최고의 정점이다 : 그 기원에서부터 남자와 여자의 실존으로 불리운 인류의 창조사업 전체의 꽃이다. : 남자와 여자는 둘 다 인간됨에 있어서 동등하며, 둘 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 인간됨에 있어서는 본질적인 이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은 배우자요 부모인 남자와 여자에 의해서 그들의 자녀들에게 전달된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창세 1,28 참조). 창조주께서는 땅의 지배권을 인류에게, 곧 "처음"서부터 공통된 존엄과 소명을 갖게 된 모든 남녀 인간들에게 넘겨주셨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인간-남자와 여자(2,18-25. 참조)-의 창조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을 발견하다. 이 기록에 대해서도 아래에 곧 언급하겠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가 먼저 밝혀 두어야 할 것은 이 성서 본문이 인간됨의 인격적 특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동등하게 이루어진 하나의 인격체이다. 왜냐하면 둘 다 인격적인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하느님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감각들(animalia)을 지닌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는 달리 이성적인 존재(animal rationale)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이 속성덕택에 남자와 여자는 가시적 세계의 다른 피조물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창세 1,28 참조).
인간 창조를 묘사하는 두 번째 기록(창세 2,18-25 참조)은 남자의 창조, 특별히 여자의 창조에 관한 진리를 표명하기 위하여 색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언어는 덜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데, 더욱 묘사적이고 은유적이어서 그 시대에 알려진 신화들의 언어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창조를 다루는 두 부분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창세기 2, 18-25의 본문은 창세기 1,27-28의 본문에 간결하게 표현된 내용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동시에 우리가 전자를 후자와 곁들여서 읽게되면 남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로 창조되었다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 진리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2,18-25에 기록된 묘사를 보면 하느님께서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부터" 창조하시어, 또 하나의 "나"로서, 그리고 남자의 동반자로서 남자 곁에 두신다. 그때까지 남자는 살아 있는 피조물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혼자였고 자신에게 알맞는 협조자를 다른 피조물들 가운데서 찾지 못한 채였다. 이렇게 탄생한 여자는 "그의 살에서 나온 살이요, 그의 뼈에서 나온 뼈"(창세 2,22 참조)로서 즉시 남자의 눈에 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 새 피조물은 "여자"(woman)라고 불리운다. 성서적 용어로 이 이름은 남자에 대한 그녀의 본질적 신분 - ''is- ''issah -을 가리킨다. 이 관계는 일반적인 현대어로선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그녀는 지아비(''is)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issah) 라 부르리라"(창세기 2,23).
성서의 본문은 인간론적인 관점에서 남자와 여자의 본질적 동등성을 인정하는 데에 충분한 근거를 제시한다. 남녀는 처음부터 그들 주변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다른 생명체들과는 달리 인격체이다. 여자는 공통의 인간성 안에서 다른 "나"이다. 창조 시초부터 그들은 "둘의 합일체"로서 나타나며 이로써 원초인 고독, 곧 남자가 "그의 일을 거들 짝"(창세 2,20 참조)을 찾지 못하는 고독이 극복된다. 이것은 단지 땅을 지배하는"(창세 1,28 참고)일을 "거들 짝"의 유무 문제인가? 분명 그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한 남자가 아내로서 상대를 맞아들여 그녀와 "한 몸"을 이루는, 인생의 동반자를 맞이하는 문제이다. 이를 위해 남자는 "자기 어버이를 떠나기"(창세 2,24 참조)까지 한다. 남녀의 창조와 같은 맥락에서 성서는 하느님께서는 제정하신 혼인을 다음 세대에게로의 생명의 전수룰 위한 불가 해소적인 조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혼한 부부애는 본질상 생명의 전수를 지향한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창세 1,28).


인격-통교-선물


7. 창세기 2,18-25의 내용 전체를 숙고하고 그것을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 꼴(창세 1,26-27 참조)이라는 성서적 진리와 결부시켜 재조명함으로써, 우리는 무엇이 인간의 인격적 특성을 구성하는지 더욱더 완전하게 이해 할 수 있다, 남녀가 모두 하느님처럼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인간 개개인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됨으로써 남자든 여자든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서에서 우리는 인간이 "홀로" 실존할 수 없다(창세 2,18 참조)는 메시지를 듣는다. 인간은 오직 "둘의 합일체"로서만 실존할 수 있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실존할 수 있다. 이것은 상호 관계, 곧 여자에 대한 남자의 관계와 남자에 대한 여자의 관계의 문제이다. 라서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로서 인격체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관계 안에서 , 즉 또 다른 "나"와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실존까지도 포함된다. 이것은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 -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통교 안에서의 생활한 일치 - 의 결정적인 자기 계시의 전조(前兆)이다.
성서의 초기 기록에서는 이 진리가 아직 뚜렷하지 않다. 구약성서 전체는 주로 하나이신 하느님의 일체성에 대한 진리를 계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이 근본적 진리 안에서 신약 성서는 하느님의 내적 생명의 신비를 계시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인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께서는 삼위 일체의 합일체, 곧 통교 안에서의 합일체이시다. 이와 관련하여 창세기에서 언급한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이라는 진리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은 그들 각자가 하느님처럼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객체라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말은 공통 인간성의 통교 안에 살면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사랑의 통교를 세상에 반영하도록 불리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랑의 통교를 통하여 삼위께서는 유일한 신적 생명의 심오한 신비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신다. 신성의 일치 안에서 하느님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는 불가사의한 신적 관계를 통하여 인격체로서 실존하신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써만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신 안에서 사랑이시라는(1 요한 4,16 참조) 진리를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남녀로 창조된 인간이 소유한 하느님의 모상과 닮음(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추정함)은 따라서 공통된 인간성 안에서의 "둘의 일체성"도 표현한다. 인격 상호간의 통교의 표지인 이 "둘의 일체성"은 인간의 창조가 신적 통교(communio)를 닮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이 닮음은 남녀의 인격적 특성이요, 동시에 소명과 책임이기도 하다. 인간 정신의 기초는 인간이 처음부터 타고난 하느님의 모상과 닮음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신·구약 성서 둘 다 이 "정신"을 발전시키게 도리 것인데, "사랑의 계명" 이 바로 이 발전 과정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둘의 합일체" 안에서의 남자와 여자는 처음부터 서로 "곁에서", 또는 "더불어" 살도록 불리울 뿐만 아니라 상호간에 "상대방을 위하여" 살도록 불리운다.
이것이 곧 창세기 2,18-25에서 말하는 "거든다"는 의미이다. :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 주리라."성서의 대목의 흐름으로 보아 이 말씀은, 우선 "인간됨" 그 자체로서 여자가 남자를 "거들어야"한다 - 남자 편에서도 여자를 도와야 한다 -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말씀은 남녀로 하여금 자신들의 인간성을 아주 새롭게 발견할 수 있고 그 의미를 온전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인간성의 근본적 차원에서 볼 때, 상호 협조와 도움의 문제이다. 인간됨은 인격 사이의 통교에로 불리움을 뜻한다. 창세기 2,18-25의 본문은 결혼이 이 부르심의 첫 번째 차원 그리고 근본적인 차원임을 밝힌다. 그러나 이 사실 이외에도 인간 역사 전체가 이 부르심의 내용 속에서 전개된다. 이역사 안에서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융합이, 서로를 위한 그리고 상호 인격적인 통교를 근본적 원칙으로 삼고 인간성 자체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발전되어 나간다. 성서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항구하게 인간에 대한 진리의 바탕, 즉 인간 실존의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끄떡없는 견고하고 불가침적인 바탕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진리는 또한 "구원의 역사"(구세사)와도 관계가 깊다. 이 점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사목헌장은 "인간 공동체"라는 주제를 다루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 예수께서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모든 이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한 17,21-22)하시며 아버지께 기도를 바치실 때, 인간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시야를 열어주셨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삼위 일체와, 사랑과 진리 안에서 결합된 하느님의 자녀들의 일치 사이의 어떤 유사성을 시사하셨기 때문이다. 이 유사성은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줌으로써만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음을 밝혀준다.
이 말씀으로써 공의회 문헌은 남자와 여자에 대한 진리는 창세기처음 몇 장에 대충 소개되어 있고 성서적이요 그리스도교론적인 인간학의 구조적 기초를 이룬다. 인간은 여자든 남자든 가시적 세계의 창조물들 가운데 유일한 존재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의 인격이다. 인격체가 된다는 말은 "자기를 내어 줌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자`실현(공의회 문헌의 표현으로는 자아 발견)을 애써 추구한다는 뜻이다. 인격에 대한 이러한 해석의 모델은 삼위 일체, 곧 위격간의 통교이신 하느님 자신이시다. 인간이 그분의 모상과 닮은꼴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인간이 다른 사람을 위한 실존, 곧 선물이 되도록 불리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남자든 여자든 각 개인의 특성에 따라 그 소명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된다. 여성의 존엄과 소명에 대한 본문헌의 묵상 안에서 인간에 관한 이 진리는 묵상의 불가피한 출발점이 된다. 창세기에서 이미 우리는 인격체들 사이의 배우자적 특성을 대충 알아 볼 수 있다. 이 배우자적 특성은 신적 계시의 빛 안에서 드러난 여성의 소명의 두 가지 독특한 차원인 모성과 동정성에 관한 진리를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가는 데에 근본적인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주가지 차원은 "때가 찼을"(갈라 4,4 참조)때에 나자렛의 "여인", 동정녀 - 어머니 안에서 가장 숭고하게 드러날 것이다.


성서적 용어 : 의인화(擬人化)


8. 성서의 ''시작''에 나타나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로 창조되었다는 표현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성서적 계시, 즉 스스로에 관한 하느님 자신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 열쇠가 된다. "예언자들을 통해서나" 사람이 되신 "아들을 통해서나"(히브 1, 1.2 참조), 다인 자신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인간적 개념과 표상들을 사용하시면서 인간적 언어로 말씀하신다. 당신을 표현하시는 데에 사용하신 방법이 이와 같이 의인화(擬人化)로 특징 지어지는 이유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로 창조되어 그분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 역시 어떤 의미에서 "인간과 비슷"하시다. 바로 이 비슷함 때문에 그분이 인간적으로 알려질 수 있다. 동시에 성서의 용어는 "비슷함"의 한계와 "유비"(類比)의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성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닮은꼴"이라는 사실을 계시하는 한편, 창조계 전체가 창조주와 철저히 분리되어 둘 사이가 전혀 "닮지 않다"는 사실도 엄연히 계시하고 있다. 인간이 비록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는 "(1디모 6, 16) 분이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전혀 다른 분", 본질적으로 "절대 타자"(他者) 이시다.
성서적 용어로 인간을 하느님의 닮은꼴로 보는 이 유비의 한계는 우리가 하느님께 "남성"의 속성이나 "여성"의 속성을 비유적으로 부여하는 성서(특히 구약) 구절들을 대할 때에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구절들 안에서 우리는 남녀 모두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로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간접적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창조주와 피조물들 사이에 비슷함이 있음을 원칙적으로 인정한다면, 성서가 하느님께 "남성"과 "여성"의 특성을 부여하는 것도 쉽게 용납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자 이사야의 몇 가지 중요한 말씀들을 인용해도 좋을 것이다." ''야훼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고 너 시온은 말하였었지.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째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49,14-15). 다른 곳엔 이런 말씀도 있다. "어미가 자식을 달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66,13). 시편에도 하느님께서 자식을 돌보는 어미로 비유되고 있다. "어미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내 마음 평온합니다. 이스라엘아, 네 희망을 야훼께 두어라."(시편 131, 2-3). 성서의 여러 대목에서 당신 백성을 돌보시는 하느님께서 자식을 돌보는 어머니와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따라서 어머니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알뜰히 "보살피셨다." 특히 당신 백성을 잉태하시고 산고를 겪으시면서 낳으신 후 친히 양육하시고 칭얼거릴 땐 어르셨다.(이사 42, 14; 46, 3-4 참조). 여러 성서 본문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신랑과 아버지의 "남성적" 사랑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호세 11, 1-4; 예레 3, 4 -19 참조), 때로는 위의 예에서처럼 어머니의 "여성적" 사랑으로 표현된다.
성서적 용어의 이와 같은 특성, 즉 하느님께 대한 의인적 표현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내재적 생명에 속하는 영원한 "생성"(生成)의 신비를 간접적으로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성"은 "남성적인"특성도 "여성적인" 특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본질상 전적으로 선적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영이시고"(요한 4,24), "여성적"이고 "남성적"이고를 막론하고 몸과 관련된 어떤 특성도 지니고 계시지 않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방법으로 영적이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 있는 "부성"도 온전히 신적이며 인간의 부성이 보여 주는 "남성적"인 육체의 특성들과 무관하다. 구약성서에서 아버지로서의 하느님께 대해서 언급하고 그분께 아버지의 칭호를 드릴 때에는 이런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을 "압바 - 아버지"(마르 14, 36)라고 부르시고 그분의 외아들이면서도 본체를 같이하시는 아들로서 이 진리를 자신의 복음의 핵심으로 삼으시며, 이로써 그리스도교적 기도의 전형적 실례를 남겨 주셨다. 여기서도 그리스도께서 호칭하신 "압바 - 아버지"는 유체와 관계없이 초인간적이요 완전히 신적인 의미 안에서의 부성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호칭을 신적 생성의 영원한 신비에 의하여 아버지와 연결된 아들의 자격으로 사용하시는 동시에 당신의 동정녀 - 어머니의 참 인간적 아들로서도 사용하셨다.
인간적 특성을 하느님의 "말씀"의 영원한 생성에 부여할 수 없고 신적 부성이 비록 육체적인 의미에서의 " 남성적" 특성을 지니고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인간들 가운데 발견되는 모든 "생성"의 완전한 모델을 추구해야 한다.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내용도 바로 이와 같은 의미를 표명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3, 14-15). 피조물의 모든 "생성"은 그 원초적인 모델을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신적이고 영신적인 저 영원한 "생성" 안에서 찾아야 한다. 창조계의 모든 생성은 이 절대적이고 창조되지 않은 모델에 맞추어 비슷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남자에게 고유한 인간적 생성의 모든 요소와 여자에게 고유한 모든 요소, 다시 말해서 인간적 "부성"과 "모성"은 , 그 자체로서 신적 "생성"과 닮은꼴로 또는 유사하게 조성된다. 또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의 "부성과 모성"은 하느님 안에서 "전적으로 다른 " , 본질에 있어서 완전히 신적이고 영적인 "부성"과 닮은꼴로 또는 유사하게 조성된다. 다른 한편 인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생성은 "둘의 합일체"에 관련된 특성을 지닌다. 여기서 둘이라 함은 "부모" 곧 남자와 여자를 말한다.



IV. 하와 - 마리아


"시작"과 죄


9.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의로운 지위에 두셨으나 인간은 마귀의 유혹을 받아 역사의 시초부터 제 자유를 남용하였고 하느님께 대립하고 하느님을 떠나서 제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 이 말로써 공의회의 가르침은 죄에 대한, 그 중에서도 특히 첫 번째 죄, 곧 "원죄"에 대한 계시된 교리를 상기시키고 있다. 성서의 "시작" - 세상과 세상 안에서의 인간의 창조 - 은 그 자체로서 지상에서의 인간의 첫 범죄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죄에 대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창세기에 기록된 내용은 남녀 인간의 창조에 대한 묘사(창세 2, 18-25 참조)에서처럼 상징적 설화의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동시에 그 기록은 "죄의 신비", 더 포괄적으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 현존하는 "악의 신비"를 계시하고 있다.
" 죄의 신비"를 다루기 위해서는 성서적 인간학의 기초인 하느님의 " 모상과 닮은꼴"에 대한 진리 전체를 반드시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진리는 인간의 창조를 창조주의 특별한 선물로 소개한다. 이 선물은 남녀 인간의 본질적 존엄의 근본과 기원뿐 아니라, 남녀를 하느님 자신의 친교적 생명에로 초대하시는 부르심의 시작도 포함한다. 계시의 빛 안에서 창조는 구세사의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다. 바로 이 시작 안에서 죄가 자체의 위치를 정하고 스스로를 반대와 부정으로 드러낸다.
역설적으로 창세기 3장에 소개된 죄는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에 대한 진리를 재확인 해 준다. 왜냐하면 이 진리는 자유, 곧 선을 선택하거나 하느님을 거슬러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 의사의 사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는 그 본질에 있어서 창조주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으시는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며 또한 처음부터 영원히 인간을 위해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바를 부정하는 것이다. 남녀를 당신 자신의 모상과 닮은꼴로 창조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충만한 선과 당신의 생명을 나누는 가운데 흘러나오는 초자연적인 행복을 주시고자 하셨다. 그런데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이 선물을 배척하는 동시에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길"(차에 3,5), 다시 말해서 자신의 창조주와 관계없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결정하게 되길 원했다. 첫 조상의 죄는 인간적인 측면, 족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내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고, 창세기(3,15)에 분명히 언급된 "악마적"(diabolic)인 측면도 포함하고 있다. 죄는 인간이 원초적으로 갖춘 의로운 지위 안에서 향유하던 원초적 일치, 즉 "나" 자신과의 일치, 남녀 사이의 상호적 일치(commuio personarum), 외적 세계인 자연과의 일치, 그리고 이 모든 일치의 원천이신 하느님과의 일치를 파괴시킨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원죄에 대한 성서적 묘사는 어떤 의미에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구분하고 있다. 이것은 나중에 쓰여진 성서 말씀에도 언급된다. 예를 들어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먼저 아담이 창조되었고 하와는 그 다음에 창조된 것입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하와가 속아서 죄에 빠진 것입니다. "(1 디모 2,13-14). 그러나 이 성서가 묘사하는 "역할의 구별"과 관계없이 첫 범죄가 하느님께로부터 지음 받은 남녀 인간의 죄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또한 유산적 성격을 지닌 " 첫 조상"의 죄악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죄를 "원죄"라 부른다.
이 죄는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로 남녀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신비를 전해 주는 성서의 말씀과 분리시켜 이해하려고 할 때 합당한 설명을 얻어낼 수 없다. 이 신비에 대한 성서의 말씀에 의지하여 죄의 구성 요소인 하느님과 :닮지 않음"의 신비, 그리고 세계사에 현존하는 악의 신비도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비슷한 방법으로 "홀로 선하시고"(마태 19,17 참조) 선이 충만하신 하느님과의 "닮지 않음"의 신비도 이해할 수 있다. 성스러움 자체이신 하느님과 "닮지 않음"인 죄가 자유와 자유 의지의 영역 안에서의 "닮음"을 전제로 k고 있다면, 바로 이 때문에 죄 안에 포함된 " 닮지 않음"이 무엇보다도 비극이요 슬픔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을 위해 영원으로부터 계획하신 선물 자체 안에서 창조주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상처를 받으시고 명백하게 "거스름 당하셨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죄악을 저지른 남녀 인간 자신도 죄로 인해서 손상을 입는다. 창세기 3장은 창조계 안에서의 인간의 새로운 상황에 대한 묘사로써 이것을 보여 준다. 남자는 "수고"를 곁들여야 밥벌이를 할 수 있고(3, 17-19 참조), 여자는 "산고"를 치르고서야 아이를 낳을 수 있다(3,16 참조). 마침내 지상에서의 인생의 종말인 죽음이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이런 식으로 먼지인 인간은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갈"것이고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3,19 참조).
성서의 이 말씀은 세대와 세대를 거쳐 확인된다. 그러나 이 말씀은 남녀 인간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이 죄로 인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희미해지고" 어떤 의미에서 "약화되었다"는 뜻이다. 죄악은 사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상기시킨 것처럼 인간을 "약화시킨다. " 인간이 본질상 하느님의 모상이요 닮은꼴이라면, 그의 위대함과 존엄은 하느님과의 계약 안에서 , 그분과의 일치 안에서, 그리고 창조의 신비 자체의 내적 "논리"인 근본적 일치를 향하여 노력해 가는 가운데 얻게 된다. 이 일치는 모든 지성적인 피조물들, 특별히 인간에 관한 심오한 진리와 연관된다. 바로 이 인간은 가시적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처음부터 하느님의 영원한 섭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들어 높여졌다.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에페 1, 4-6). 성서의 이 가르침은 전체적으로 보아 하느님의 예정이 모든 남녀 인간 개개인에게 아무 예외도 없이 해당된다고 천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너를 지배할 것이다"


10. 창세기의 묘사에서 인간의 죄의 결과에 대한 진리가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남녀 개인의 인격적 존엄을 이루는 원초적 관계가 손상된다. 남자든 여자든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이다. 따라서 그는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이다. 동시에 이 유일하고 복사될 수 없는 피조물인 인간은 "자기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만 자신을 온전히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둘의 일치"와 남녀의 인격적인 존엄이 그 안에서 드러나는 "통교"의 관계가 시작된다. 따라서 우리가 여자에게 해당되는,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창세기 3, 16)는 성서의 묘사를 대할 때, 남녀 모두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에 관련된 "둘의 합일체"가 파괴되고 끊임없는 위협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위협은 여인에게 있어서 더욱 심각하다. 왜냐하면 이 경우 "성실하게 자신을 내어주는 역할", 다시 말해서 상대방을 "위한" 삶을 대신하여 지배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 "남자가 너를 지배하리라. " 이 "지배"는 남녀가 "둘의 합일체"안에서 누리던 근본적 평등의 균형을 깨트리고 상실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여자 편에서, 더욱 불리하게 작용한다. 반면 인격체로서의 존엄에서 나오는 평등만이 진정한 "인격적 통교"의 특성을 그들의 상호 관계에 부여할 것이다. 창조주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선물이요 권리인 이 평등의 파괴는 여성의 불이익을 조장하는 한 요소를 표함하며, 동시에 남자의 진정한 존엄을 약화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남녀가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로 창조될 때 그분이 원초적으로 새겨 넣으신 "정신"의 차원 안에 극도로 민감한 부분과 만나게 된다.
창세기 3,16의 말씀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그것은 혼인 안에서의 남녀의 상호적 관계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다. 그것은 배우자적 사랑의 분위기에서 탄생하는 원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원의 안에서 여성의 "성실한 자기 증여"는 남편 쪽에서의 상응한 바탕으로만 그 둘(특히 여성 쪽에서)이 인격의 존엄에 맞는 진정한 "둘의 합일체"로서의 자신들을 발견할 수 있다. 혼인의 결합은 서로에 대한 존경을 요구하고, 남녀 양편의 인격적 주체를 참되게 완성시켜나갈 것을 요구한다. 여성은 "지배"당하는 객체나 남성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성서 본문의 말씀은 원죄와 그 죄가 남녀 안에 미치는 결과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유산적 죄의 멍에를 지고 그들은 자신들 안에서 끊임없이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지님 채 살아간다. 이 경향을 성요한은 삼중의 욕정이라고 표현하는데, 눈의 쾌락, 육체의 쾌락, 그리고 생활의 자랑(1요한 2,16 참조)이 바로 그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창세기(3,16)의 말씀은 이 삼중의 욕정, 곧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남녀 상호간의 관계에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는지를 보여 준다.
창세기의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 혼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간접적으로는 사회 생활의 다른 측면들에 대해서도 관련되어 있다. 그 측면들이란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불이익이나 차별이 여자에게 주어지는 상황들을 말한다. 남녀 인간의 창조에 관해서 계시된 진리는 객관적으로 보아서 부당하고 불의한 모든 상황들을 거슬러서 반박하는 데 중요한 논거를 구성한다. 모든 인간이 자신들 안에 타고 난 죄의 유산은 이 상황들 안에 포함되고 또 그 안에서 표현된다. 성서는 여러 곳에서 그런 상황의 실재를 확인함과 동시에 회개, 곧 악으로부터의 정화와 죄로부터의 해방의 필요성을 선언한다. 죄는 이웃을 상해하고 상해입은 사람뿐 아니라 상해입히는 사람까지도 "작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로부터 계시된 말씀의 불변하는 진리이다. 그 안에 이 세상 마칠 때까지 유효한 성서의 "정신"이 표현되어 있다. 우리시대에 "여성들의 권리"의 문제는 인권의 폭 넓은 차원에서 상정되어 왔다. 성서적 그리고 복음적 메시지는 "둘의 합일체"에 관한 진리, 다시 말해서 남녀의 특수한 다양성과 인격적 독창성에서 비롯된 존엄과 소명에 대한 진리를 수호하면서, 오늘날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문제에 빛을 던져 주고 있다. 따라서 "그가 너를 지배할 것이다. "(창세기 3,16)라는 성서적 표현에 여성들이 당연히 반발하더라도 이것이 어떤 조건하에서도 곧바로 여성들의 "남성화"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남성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미명 아래 여성들이 남성적 특성들을 자신들에게 부여함으로써 자신들 고유의 여성적 "독창성"을 상실해서는 안된다. 마땅히 우려되는 바, 여성들이 이런 길을 추구하다 보면, 그들은 "충만함에 도달하기는 " 고사하고 자신들이 타고난 풍부한 가치들을 변질시키거나 상실하고 말 것이다. 이 가치들은 정말 풍부하다. 성서의 표현대로 방금 창조된 여인 앞에서 첫 남자는 경이와 찬탄의 말, 지구상의 남자의 역사 전체를 주름잡을 수 있는 말을 늘어놓는다.
여성의 인격적 특성들은 결코 남성의 특성들보다 열등하지 않다. 그들은 서로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와 똑같이 이 특성들을 바탕으로 한 인격체로서 자신의 "충만함"과 자신의 존엄과 소명을 이해해야 한다. 여자는 창조되는 그 순간에 풍부한 여성적 특성들을 받았고 자신에게만 유보된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로서의 그 특성들을 계속 유산으로 이어주고 있다. 한편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그가 너를 지배하리라."는 성서의 말씀으로 시사된 죄의 유산은 여성 자신의 존엄과 소명을 올바로 이해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 이 악의 유산을 청산하는 작업은 세대와 세대를 거쳐 남자든 여자든 인간이면 누구나 수행해야 하는 사명이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성의 존엄과 소명을 거슬러 행동 할 때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소명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복음"


11. 창세기는 죄가 인간의 "시작"에 일어난 악이고 그 결과가 전인류에게 무겁게 드리워졌다는 것을 증언한다. 동시에 창세기는 악과 죄를 극복하게 될 승리를 처음으로 예고한다. 이것은 보통으로 "첫 복음"이라고 불려지는 창세기 3,15의 말씀에 나타난다.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인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구속자에 대한 이 예언의 말씀이 "여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 여인은 인간의 구속자가 되실 분의 어머니로서 "첫 복음"의 맨 처음에 등장하신다. 그리고 구원이 약을 거슬러 일어나는 투쟁을 통하여, 곧 여인의 후손과 "거짓말의 아비"(요한 8,44)인 자의 후손 사이에 맺어진 "원수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거짓의 아비와 여인 사이의 투쟁이기도 하다.
이 말씀들은 계시 전체의 포괄적인 시야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우선 복음의 준비로서 나중엔 복음자체로서 이 중요한 계기에 두 여인, 곧 마리아와 하와가 여성의 이름으로 함께 등장한다.
"첫 복음"의 말씀들을 신약 성서에 비추어 다시 읽을 대, 인간 역사 안에 현존하는 악의 주인을 거슬러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구속자와 더불어 투쟁하시는 저 "어인"의 사명이 선명하게 드러남을 볼 수 있다.
하와와 마리아의 비교는 신적 계시로부터 획득한 신앙의 유산을 반성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그것은 교부들과 교회 저술가들과 신학자들이 자주 채택한 주제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이 비교를 통해서 우선적으로 차이 또는 대비(對比)가 부각된다. 하와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창세기 3,20)로서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로 지어진 인간의 창조에 대한 진리와 원죄에 대한 진리를 포함하는 성서적 "시작"의 증인이다. 반면에 마리아께서는 그분자신이 구세사에서 구원된 첫 사람으로서 "새 창조"(2고린 5,17)가 되시기 때문에 , 새로운 "시작"과 "새창조"의 증인이시다. 마리아께서는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시다. 왜 첫 복음의 말씀들이 그 "여인"에 관하여 그처럼 대단한 강조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맺은 하느님의 새롭고 결정적인 계약, 즉 그리스도의 구원의 성혈 안에서 이루어지는 계약이 그 여인 안에서 시작된다.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 계약은 한 여인, 곧 나자렛에서 수태 고지를 받은 저 독창성이 드러난다. 구약 성서에서 여러 번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역사에 개입하실 때, 사무엘과 삼손의 어머니의 경우처럼 당신 스스로를 여인들에게 개방하여 말씀하신다. 그러나 인류와 계약을 맺으시기 위해서는 노아, 아브라함, 모세와 같이 남자들에게만 나타나신다. 그런데 영원하고 불가 해소적인 새 계약의 시작엔 한 여인, 나자렛의 동정녀께서 등장하신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랄라 3,28)는 사실을 저적하는 하나의 표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원죄의 유산인 남녀 사이의 상호 대립은 근본적으로 극복된다. 성 바오로의 말처럼"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대문이다."(갈라 3,28).
바오로의 이 말은 원초적인 "둘의 합일체"를 가리킨다. 이 합일체는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로 지음을 받고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통교를 모델로 하여 이루어진 남녀 인간의 창조와 연결된다. 성 바오로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구원의 신비가, 창조주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에 연관된 찬조의 신비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재현하고 갱신한다고 말한다. 바로 이 때문에 남녀 인간이 창조되는 날,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기 1,31). 구원은 어떤 의미에서 그 근본에 있어, 죄와 인간 역사 안에 누적되는 죄의 유산에 의하여 본질적으로 "약화된"선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첫 복음에 등장하는 저 "여인"은 구원의 전망(展望)에 꼭 들어맞으신다. 하와와 마리아의 비교는 마리아께서 당신 안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창세 3,20)인 하와로부터 시작되는 여서의 신비를 받아들이시고 포용하신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은 "새 아담이시면서 마지막 아담이신"(1고린 15,45 참조)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이시고 포용하신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첫 아담의 본성을 다인 자신의 인격 안에 받아들이셨다. 신약 성서의 핵심은 아버지와 한 본체이신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다는 사실에 있다. 그분은 말씀의 신적 위격에 인간성을 일치시키신다. 이 때문에 구원을 완성시키시는 이분이 참 사람도 된신다. 구세(救世)의 신비는 아들 하느님께서 아담의 유산으로서의 인간성을 떠맡으시어 그와 비슷하게 되시고 "죄를 제외한"(히브 4,15) 모든 것 안에서 모든 인간처럼 되셨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로써 그분은 공의회의 가르침대로 "인간을 인간 자신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이 높이 불리었음을 밝혀 주신다. " 어떤 의미에서 그분은"인간이 무엇인지"(시편 8,5 참조) 인간 스스로가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신앙의 전통 안에서, 그리고 세기를 두고 지속되어 온 그리스도교적 사색의 전통 안에서 아담 - 그리스도의 비교는 하와 - 마리아의 비교와 자주 연결된다. 마리아 역시 " 새 하와"로 묘사된다면 이 비교는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물론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특별히 마리아를, "여인"이라는 성서적 표현에 담긴 모든 것의 완전한 계시로 보는 견해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 계시는 구원의 신비에 부합된다. 마리아께서는 어떤 의미에서 창세(3,16)에서 말하는 한계를 뛰어넘어 "새 시작"에로의 귀환을 뜻한다. 이 "시작"안에서 우리는 창조 때에 그리고 하느님의 영원한 의중 안에, 다시 말해서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의 품안에 의도된 바로 그 "영인"을 만나게 된다. 마리아께서는 모든 여성 개개인의 존엄과 소명의 "새 시작"이시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열쇠는 루가 복음 사가가 수태 고지를 받고 난 후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마리아의 입술을 빌려 한 말에서 발견된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루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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