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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987.12.30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 (0)
작성자 : 복음화위원회
등록일 : 2008.03.01 10:49
조회수 : 2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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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현 세계에 관한 신학적 탐구와,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 담긴 가르침에 따라, 개발의 개념 자체가 더욱 완벽하게, 더욱 섬세하게 규정될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 개념을 실현시킬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이다.

회칙 ''민족들의 발전'' 반포 20주년을 맞이하여

사회적 관심

SOLLICITUDO REI SOCIALIS

1987. 12. 30.

회칙 [민족들의 발전] 반포 20주년을 맞이하여
주교, 사제, 수도자 가족들에게 교회의 자녀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회칙

성 염 번역

I. 서 론
II.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참신함
III. 현대 세계에 대한 진단
IV. 진정한 인간 발전
V. 현대 문제점들에 관한 신학적 해독
VI. 몇 가지 특별한 지침
VII. 결 론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인사와 더불어 사도적 축복을 보낸다.


I. 서 론

1. 교회의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은 인간의 참다운 발전과 사회가 인간의 모든 차원을 존중하고 신장시키는 사회로서 발전함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이 관심을 극히 다양한 양상으로 표명하여 왔다. 근자에 있어서 이에 개입하는 특별한 수단의 하나로서 로마 교황의 교도권이 행사되어 왔으니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효시로 하여1) 이 문제를 수시로 다루어왔고 때로는 각종 사회적 문서의 반포 시기를 전대에 나온 문서의 주년 기념일과 맞추는 관습도 생겨났다.2) 교황들은 이들 메시지의 내용을 이용하여 교회의 사회 교리의 새로운 측면에다 참신한 빛을 제시해 왔다. 그 결과 이 교리는 레오 13세의 탁월한 공헌에서 시작되어 역대 교도권의 기여를 받는 가운데 시의에 맞는 하나의 교리적인 ‘체계’로 갖추어져 왔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말씀의 충만한 빛을 받으면서3) 성령의 보우를 입어(요한 14,16.26; 16,13-15 참조), 역사의 도정 속에 전개되는 사건들을 해독하는 가운데, 이 교리 체계가 구축된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적인 사색과 인간 학문들의 보조를 받아가면서, 현세 사회를 책임지고 건설하라는 자신의 소명에 호응하도록 인도하고자 노력한다.

2. 이러한 사회 교리의 방대한 체계 중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 존경하올 본인의 선임자 바오로 6세가 1967년 3월 26일자로 반포한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4)이다.
이 회칙의 장구한 영향력은 1987년에만도 교계와 사회 각계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개최된 행사들을 보아서도 족히 알 수가 있다. 같은 의도에서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는 동방 교회 각급 시노드와 각국 주교회의에 회람 서한을 보내어 회칙의 반포 주년을 보람 있게 거행할 만한 착상과 제안을 요청한 바 있었고, 필요하다면 그 가르침을 시대에 맞추어 절충할 방안도 물은 바 있었다. 20주년을 기념하는 마당에서는 동위원회가 장엄한 기념식을 마련하였고 본인이 거기서 폐막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5) 그리고 지금 위에 말한 회람 서한에 대한 각계의 대답을 고려하여, 1987년의 막이 내리는 이즈음에 맛민족들의 발전맜의 주제들에 관하여 한 편의 회칙을 헌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하였다.

3. 이리하여 본인은 두 가지 목적을 주로 이루고자 하는 바이니, 한편으로는 바오로 6세의 이 역사적인 문헌과 그 가르침에 경의를 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베드로좌에서 본인의 경애하올 선임자가 되는 분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서 사회 교리의 연속성과 아울러 그 부단한 쇄신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상 연속성과 쇄신이야말로 교회의 가르침이 영구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이 이중의 차원은 사회 영역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에 있어서 전형적인 특색이기도 하다. 일면으로 교회의 사회 교리는 항구적이어서 그 근본 염원에 있어서, 그 ‘반성의 원리’에 있어서, 그 ‘판단 기준’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행동 지침’에 있어서,6)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복음과의 산 연결에 있어서 한결같이 지속된다. 다른 면에서 그것은 늘 새로운 것이니, 역사적 여건의 변화에 의해서나, 사람과 사회의 생활의 장이 되는 사건들의 부단한 유동성에 의해서 적응이 필요하고 적절하다고 시사될 적에는 이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4. 본인은 회칙 [민족들의 발전]이 비록 60년대의 인간과 사회를 대상으로 한 발언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양심에 건네는 호소라는 점에서 80년대의 말에 이른 오늘에도 여전히 위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아직도 이루어지기에 요원한 ‘민족들의 발전’을 염원하고 목표로 삼는다는 맥락에서 현대 세계의 기본 노선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 메시지의 영향력을 확산시켜 20년 전에 비하여 극적인 성격이 조금도 감소되지 않은 역사의 현순간에다 가능한 대로 적응을 시켜보고자 한다.
잘 알다시피 시간은 항속적이고 불변하는 리듬을 갖고 있는 법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리듬이 한층 가속화된 느낌을 주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들이 증폭되고 복잡하다는 이유에서 특히 느낌이 심하다. 따라서 지난 20년이 경과하면서 세계의 면모는 어떤 항속적인 기본 요소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현저한 변화를 보였고 심지어는 전혀 새로운 면모도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제3천년대의 전야에 해당하는 이 시점은 널리 만연된 어떤 ‘기대’ 다시 말해서 새로운 ‘대림절’7)을 맞는 느낌이며 그래서 그러한 기대가 모든 이에게 미치고 있다. 그런 정황이 회칙의 가르침을 더욱 상세히 궁구하고 그 가르침이 미래에 더욱 발전할 가능성을 가늠하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하겠다.
이 고찰의 목표는 현세계에 관한 신학적 탐구를 통해, 또 회칙에 담긴 가르침에 따라, 개발의 개념 자체가 더욱 완벽하게, 더욱 섬세하게 규정될 필요성을 강조하려는 데에 있다. 또한 그 개념을 실현에 옮기는 몇 가지 방안을 지적하는 데에도 목표가 있다.



II.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참신함

5. 교황 바오로 6세의 문서는 출현하자마자 그 참신함으로 말미암아 여론의 주의를 끌었다. 구체적으로 또 극히 명료하게 문서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들어 있는 연속성과 새로움이라는 특성을 밝혀낼 수가 있었다. 회칙을 주의 깊게 재독함으로써 이 가르침의 여러 측면을 재발견하려는 것이 본 고찰의 주요한 흐름이 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본인은 이 회칙이 반포된 시기에 관하여, 즉 1967년에 관하여 몇 마디 하고자 한다. 교황 바오로 6세가 그 해에 사회적 회칙을 반포하기로 선정한 사실은 이 문서를 1965년 12월 8일에 폐막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결부시켜 고찰하도록 요구한다.

6. 여기서 우리는 단순한 연대적 근접 외의 무엇을 감지할 수가 있다. 회칙 [민족들의 발전]은 어느 면에서 공의회의 가르침을 적용시키는 문서라고 하겠다. 회칙이 공의회의 문서를 계속해서 인용한다는 이유에서만 아니고8) 오히려 회칙이 교회의 동일한 관심, 다시 말해서 공의회로 하여금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의 중요한 주제들을 발전시키고 조정하려는 노력 전체에, 그중에서도 사목 헌장에 나타난 노력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이 공의회의 호소, 사목 헌장의 첫머리에 나오는 호소에 대한 일종의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진실로 인간적인 것이라면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9) 이 말들은 공의회의 이 위대한 문서에 영감을 주는 기본 사상이며, 사실 문서는 수백만 인간들이 살고 있는 빈곤과 저개발의 처지를 언급하는 데에서 발언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빈곤과 저개발이 이름을 바꾸면 오늘의 ‘슬픔과 번뇌’이며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들의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이처럼 고통과 슬픔이라는 광활한 현상을 배경으로 삼아 공의회는 기쁨과 희망의 지평선을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바오로 6세의 회칙은 같은 목적을 가진 것으로 공의회의 염원을 지극히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7. 또한 거기에는 회칙의 주제라는 것도 있으니,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이라는 위대한 전통을 따르면서 공의회가 이룩한, 특히 사목 헌장에 나타나 있는 새로운 제시와 풍부한 종합을 직접적으로 취한 것이기도 하다.
그 내용과 주제들에 관해서 회칙은 다음의 사실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천명하고 있으니, 우선 ‘인간성에 관한 전문가’인 교회는 “그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 줄 의무를”10) 의식한다는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교회의 사명이 ‘봉사’에 있음과, 비록 교회가 백성들의 구체적인 상황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기능과는 구분되는 사명이라는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11) 아울러 바로 그 백성 가운데에 현저한 불평등이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한다.12) 그리고 오랜 세기에 걸친 교회의 전통을 충실히 반향하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재확인하여 ‘재화의 보편적 목적성’을 강조한다.13) 또한 문화와 기술 공학의 문명이 인간적 해방에 기여함을 인정하면서14) 동시에 그 한계를 간과하지는 않고 있다.15) 끝으로 회칙의 본주제가 되는 개발이라는 특정한 소재에 있어서 더 발전한 국가들이 “개발 도상국들을 원조해야 할 중대한 의무”16)를 강조하고 있다. 회칙이 제기하는 개발의 이상 자체가 사목 헌장이 이 문제에 접근하는 자세에서 직접 도출된 것이다.17)
이러한 인용과 다른 많은 인용으로 미루어 회칙이 사회 문제에 관한 공의회의 가르침, 특별히 민족들의 발전과 저개발이라는 특정 문제에 관한 가르침을 적용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8. 이러한 간단한 분석은 또한 회칙의 참신함을 더 잘 파악하게 해준다고 하겠으니 그것을 우리는 세 가지 점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는 문서가 가톨릭 교회의 최고위 당국자가 반포하였음에도 교회와 더불어 ‘모든 선의의 사람들’18)을 상대로 발언을 한다는 것과 언뜻 보기에 경제와 사회에 국한되는 문제, 곧 민족들의 발전에 관해서 다룬다는 사실에 있다고 하겠다. ‘개발’이라는 용어 자체가 사회 및 경제 과학의 사전에서 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회칙 [민족들의 발전]은 ‘노동자들의 처지’를 다룬 바 있는 회칙 맛새로운 사태맜의 노선을 직접 따르고 있다.19) 피상적으로 관찰한다면 양 주제가 종교 제도라고 보는 교회의 합법적인 관심에 벗어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노동자들의 처지’라는 주제보다 ‘개발’은 더욱 그렇다.
레오 13세의 회칙과 연속성을 갖고서 바오로 6세의 문서는 개발과 연관된 문제의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다는 공적이 있음은 인정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이 분야에 대한 교회의 개입이 정당하고 필요함도 아울러 인정되어야 한다.
덧붙일 것은 교회의 사회 교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의 생활에 그리고 사회의 생활에 적용하는 성격의 것임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을 뿐더러 사회나 인간과 결부된 지상의 현실에 적용하여 거기에 ‘반성 원리’와 ‘판단 기준’과 ‘행동 지침’을 제공하는 것임이 증명된 것이다.20) 여기 바오로 6세의 문서에서 우리는 이 세 가지 요소가 탁월한 실천적 방향에서, 다시 말하여 윤리적 행동을 지향하여 엮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교회가 ‘민족들의 발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때에 그의 특정한 전문 영역을 벗어났다거나 더욱이나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에서 이탈하는 것처럼 비난하면 안된다.

9.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두번째 참신함은 일반적으로 ‘사회 문제’라고 일컫는 분야에 열려진 폭넓은 시야라고 하겠다.
실제로 요한 23세의 회칙 [어머니요 스승]은 이 폭넓은 전망 속으로 들어간 것이었고21) 공의회는 사목 헌장에서 이를 반영한 바 있다.22) 하지만 교회의 사회 교리는 사회 문제가 세계적 차원을 띠게 되었다고 명백하게 주장할 수 있을 만한 정도에 이르러 있지는 않았으며,23) 바오로 6세가 그 회칙에서 한 만큼 이 주장과 그에 수반된 분석이 ‘행동을 지향하여’ 작업이 된 적은 없었다.
그 같은 명시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내용이 크게 풍부해졌으며 그 점은 명기할 만하다.
먼저, 일어날 만한 오해가 제거되어야 하겠다. ‘사회 문제’가 전세계적인 차원을 띠게 되었다고 해서 그 예봉을 상실했다거나 국가적 지역적 비중을 잃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특정 국가나 지역의 기업이나 노동자의 처지 또는 노동 조합 운동 등을 아무런 연관이 없는 고립된 것처럼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정반대로 지역적 범위라든가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는 인자들의 영향력에 갈수록 좌우되는 것이다.
불행히도 경제적 관점에서 개발 도상국들이 선진국들보다도 숫자가 많다. 개발이 제공하는 선익과 혜택을 결한 인간들의 숫자가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들의 숫자보다도 훨씬 많다.
그리하여 우리는 원래 인간 모두를 위해 있는 생존 수단의 불평등한 분배라는 문제, 그리고 그 수단에서 오는 혜택의 불평등한 분배라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더군다나 이것이 곤궁한 사람들의 잘못에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그들의 자연 조건이나 환경 전체에 달린 불가피한 성격의 것이 전혀 아니다.
바오로 6세의 회칙은 사회 문제가 세계적인 차원을 띤다고 공언함으로써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윤리적 사실,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에 토대를 둔 사실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회칙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 중대한 사실을 모든 이가 인식해야 하겠다.”24) 왜냐하면 그것이 양심과 직결되는 문제이며 양심은 윤리적인 결정의 원천이 되는 까닭이다.
이 같은 틀에서 본다면 회칙의 참신성은 역사적인 주장, 즉 사회 문제의 보편성을 주장한 거기에 있지 않고 그러한 현실을 윤리적으로 평가한 데에 있다. 그러므로 부강국들의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시민들은 비록 개인으로라도, 더군다나 그들이 그리스도 신자들일 경우, 도덕적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며, 각자의 책임의 정도에 따라서, 개개인의 결정이나 정부의 결정에 있어서 이 같은 세계적인 관련성, 자기들이 하는 행동과, 수백만 인간들의 빈곤과 저개발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상호 의존성을 고려에 넣어야 할 도덕적인 의무를 지지 않으면 안된다. 바오로 교황의 회칙은 이 도덕적 의무를 더욱 예리하게 “연대성의 의무”25)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주장만은, 비록 세계에서 많은 상황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회칙이 쓰여질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구속력과 효과를 지닌다.
다른 한편, 이 같은 윤리적인 견해의 노선에서 이탈하지 않고도, 회칙의 참신함은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세계적인 상호 의존을 고려에 넣을 때에, 크게 바뀐다는 사실에 있다. 진정한 발전은 단순히 부의 축적, 재화와 서비스의 더 많은 향유에 있을 수가 없다. 만약 이러한 혜택이 대중의 발전을 희생시킨 대가로,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차원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말이다.26)

10. 세번째로 회칙은 교회의 사회 교리 전체에 그리고 발전의 개념 자체에 참으로 고유한 공헌을 하였다. 이 고유함은 그 문헌의 결론적인 항목, 어떤 면에서 그 요약이요 문서의 역사적인 표어라고도 할 글귀에서 알아볼 수가 있다. “발전은 평화의 새 이름이다.”27)
실제로 사회 문제가 전세계적인 차원을 띠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정의에 대한 요청이 오직 그 차원에서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요청을 무시할 적에는, 불의의 희생자들 속에 폭력으로 응수하려는 유혹을 조장할 수가 있고 과연 많은 전쟁의 발발은 여기서 연원한다. 원래 만인에게 돌아가기로 되어 있는 재화의 분배에서 제외당한 사람들은 스스로 물을 것이다. 먼저 우리를 폭력으로 취급하는 자들에게 왜 폭력으로 응수해서는 안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만일 사태를 세계가 이데올로기의 블록으로 양분된 사실 - 이러한 분열은 1967년에도 이미 존재했었다 - 에 비추어 검토한다면, 또 그에 뒤따르는 경제적 정치적 반대 급부와 종속 관계에 비추어 검토한다면, 위험이 훨씬 큼을 알 수 있다.
회칙의 역사적인 문구의 충격적인 내용을 일차 고찰하고 나면 문서가 빗대어 말하는 두번째 내용에 의해서 그 뜻이 보완됨을 알게 된다.28) 민족들의 발전을 증대시키는 데에 쓰일 수 있고 쓰여야 마땅한 거금들이, 선진국들과 후진국들을 막론하고 소수 개인들과 집단들의 치부에 이용되고 있거나, 무기 비축의 증대에 할당되고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절실한 우선 순위를 뒤집어 엎는 짓을 무슨 수로 정당화한다는 말인가? 곤궁한 국가들을 돕는, 자본의 직접적인 이동을 훼방하는 장애물들을 감안한다면 이 문제는 훨씬 심각하다. 만일 “발전이 평화의 새 이름”이라면, 전쟁과 군비야말로 민족들의 총체적인 발전의 제일 큰 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이 표현에 비추어볼 때에 우리는 발전의 개념 자체를 재검토하도록 요청받는다. 물론 이것은 다수 대중의 고통은 무시한 채로 또 개인들과 국가들의 이기심이 주요 동기가 되면서 재화의 증대를 통해서 물질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야고보서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바와 같이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까? 여러분의 지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욕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합니다”(야고 4,1-2).
그와 반대로 다른 세계에서는, 온 인류의 공동선에 대한 관심에 의하여, 또 개인적 이윤의 추구가 아닌 “모든 이의 정신적이고 인간적인 발전”을 위하는 배려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계에서는 평화가 가능하며 “인간들 사이에 더욱 완전한 정의”29)의 결실로서 그 평화가 가능하다.
회칙의 이 새로운 요소도 영구적이고도 현시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며, 정의에 대한 존중과 참다운 평화의 건설 사이에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현대의 태도에 비추어보더라도 그 가치를 지님이 분명하다.



III. 현대 세계에 대한 진단

11. 그 당대만 해도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기본 가르침은 그 새로운 성격 때문에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사회적 맥락이 20년 전의 그것과 온전히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그러한 이유에서 본인은 오늘의 세계가 갖는 몇 가지 특성을 간략히 검토하여 바오로 6세의 회칙의 가르침을 ‘민족들의 발전’이라는 견지에서 다시 한번 개진시켜 보고자 하는 바이다.

12. 맨 먼저 주지시킬 사항은 한때 그처럼 생동하였던, 발전에 대한 희망이 오늘날에는 참으로 실현이 요원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 회칙이 환상으로 그친 것은 아니다. 회칙의 침중한 언어들, 때로는 극적인 음조까지 띠는 그 언어는 상황의 심각성을 각성시키는 데에 그쳤고, 문제의 해결에 기여하지 않으면 안될 시급한 의무를 만인의 양심 앞에 제기하였을 따름이다. 당대에는 일종의 낙관론이 널리 유포되어 있어서 극단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도 빈곤한 민족들의 경제적 후퇴를 극복하는 가능성이 있으리라는 데에, 그들에게 기저 구조층을 마련해 줄 수 있으리라는 데에, 그들의 공업화를 지원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낙관하였다.
그 같은 역사적인 배경에서 각국의 노력 외에도 또는 그 노력 위에 국제 연합은 두 차례의 10개년 개발 계획을 추진해 왔던 것이다.30) 사실 어느 정도로는 쌍방적인, 또는 다각적인 노력이 여러 나라를 원조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추구되어 왔으며 그러한 국가들 중의 일부는 이미 얼마 전부터 독립을 이룬 지 상당히 되었지만 절대 다수는 탈식민지화의 과정에서 막 탄생한 신생국들이었다. 교회로서는 이 같은 새로운 상황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깊이 이해할 의무를 느꼈다. 교회의 종교적이고 인간적인 영감으로 이러한 노력을 성원하겠다는 희망에서, 이러한 노력에 그야말로 ‘혼’을 넣어주고 효과적인 충동을 제공하려면 문제를 깊이 파악할 의무가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13. 이처럼 다채로운 종교적 인간적 경제적 기술적인 창안들이 헛된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리는 데에 성공을 거두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말해서, 여러 상황을 고찰할 때에, 세계의 현상황은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보아 오히려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이유에서 본인은 다른 인자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몇 가지 일반적인 징후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정황과 통계의 분석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도 무수한 인간들이,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인간이요 유일회적인 인간들이, 어린이들과 성인들과 노인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빈곤의 짐을 지고 고통을 당하는 현실 사정만 일별해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세계 도처에서 그들의 상태가 현저하게 악화되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아예 희망을 박탈당한 자들이 수백만이다. 다름아닌 우리 형제들과 자매들이, 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완전 결핍과 완전 빈곤의 비극 앞에서 우리에게 의문을 제기하시는 분은 다름아닌 주 예수이시다(마태 25,31-46 참조).

14. 첫번째 부정적인 평가는 소위 선진 북반구와 개발 도상의 남반구 사이의 격차가 항속적일 뿐더러 흔히는 갈수록 확대 일로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리학적인 용어는 어디까지나 지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실상 부유와 빈곤의 경계는 선진 사회든 개발 도상의 사회든 동일한 사회 속에도 엄연히 가로지르고 있는 현상이다. 사실 빈곤의 수준에 이르는 사회적 불평등은 부강국에도 존재하고 있듯이 이와 병행되는 현상으로 저개발 국가에서도 이기심의 발로와 부의 허세가 당혹할 정도로 노골적이어서 가히 스캔들이 될 정도이다.
세계 일부 지역에서, 특히 선진 북반구에서 가능한, 풍요한 재화와 서비스가 남반구에서는 용납 못할 정도로 지연되고 있으며 바로 이 지정학적인 지역에 인류 대다수가 살고 있다.
식료품의 생산과 분배, 위생, 보건과 주택, 음료수의 취수 가능성, 작업 여건(특히 여성들의 조건), 예상 수명 그리고 여타의 경제적 사회적 지수 등 여러 부면을 살펴볼 때에, 전반 상황은 그 자체로 보든 선진국의 해당 여건과 관련시켜 보든 절망적이다. ‘격차’(갭)라는 단어가 저절로 머리에 떠오를 정도이다.
이 단어까지도 현실 자체를 형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하겠으니, 그것이 마치 고착된 현상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과 개발 도상국에서 보이는 개발의 속도가 근년에 달라졌고 바로 이것이 그 간격을 넓히는 데에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개발 도상국들, 그중에서도 극히 빈곤한 국가들은 크게 우려할 정도로 지체되는 상황에 처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다 다양한 민족 집단들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와 가치 체계의 차이, 경제적 발전의 정도와 늘 부합되지는 않을 뿐더러 오히려 간격을 조성하는 차이를 덧붙여야 하겠다. 이것들은 사회 문제를 훨씬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자 측면들이니 이 문제가 전반적인 차원을 띠어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확대 일로에 있는 격차로 나누어진 세계의 여러 지역을 관찰할 때에, 그리고 그 지역 하나하나가 자기 나름의 성취를 얻으면서 자기 나름의 길을 걷고 있음을 주지할 때에, 우리의 하나뿐인 세계를 두고 여러 세계를 운위하는 어법, 즉 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 제4세계를 말하는 시사 용어가 이해된다.31) 이런 표현들은 비록 모든 국가들을 빈틈없이 분류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의미가 깊다. 이 말 자체가 세계의 단일성, 말하자면 인류의 단일성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다는 의식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는 표징이다. 그런 표현은 객관적 가치가 있든 없든 간에 도덕적인 내용을 그 속에 숨기고 있으며 따라서 “전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주는 표지요 도구인”32) 교회로서는 그 앞에서 무관할 수가 없는 것이다.

15. 하지만 지금까지 열거한 저개발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지표’에다 똑같이 부정적이고 심지어는 더 곤란한 다른 지표들, 문화 영역에서 시작되는 지표들을 첨언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도면이 어디까지나 불완전한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문맹, 고등 교육을 받기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한 상태, 자기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참여할 수 없는 무력함, 각종 형태의 착취와 개인과 그의 인권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심지어는 종교적 억압, 온갖 유형의 차별, 특히나 인종의 차이에다 근거를 둔 가증할 형태 등이 있다. 만약 이런 병폐의 일부라도 선진 북반구의 여러 지역에서 감지되는 통탄할 상황이 있다면, 개발 도상국 또는 저개발국에서는 더욱 빈번하게, 더욱 지속적으로, 뿌리뽑기 더욱 어려운 양상으로 자리잡고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오늘의 세계에서는 다른 여러 권리 중에서도 경제적 창의의 권리가 자주 말살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에게나 공동선을 위해서나 중대한 권리이다. 경험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 권리가 부정되거나 사회에서 모든 이의 ‘평등’이라는 명분으로 제한을 가할 경우에 창의의 정신, 말하자면 시민의 창조적 주체성이라는 것이 위축되거나 실제로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다. 그 결과로 진정한 평등과는 거리가 먼 ‘전반적 하락’(levelling down)이 발생한다. 창조적인 솔선 대신에 피동성, 관료 체제에 대한 의존과 종속이 등장한다. 관료적인 장치가 재화와 생산 수단의 체계 전체에 대하여 ‘소유주’가 아니라면 적어도 ‘명령’하고 ‘결정을 내리는’ 단독 기구가 되고 인간 개개인을 절대에 가까운 종속과 흡사한 위치에 몰아넣고 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에 있어서 노동자 무산 대중이 처해 있던 전통적인 종속 관계와 유사하다. 이것은 좌절과 절망감을 유발하고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 생활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만들며 많은 수가 이민을 가게 되거나 적어도 ‘심리적’ 이민이라는 형태를 조장하게 만든다.
이 같은 상황은 ‘각국의 권리’라는 관점에서도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사실 한 국가 공동체 내에서 경제적, 사회 정치적 차원들이 상호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한 국가가 자국의 경제적, 사회 정치적 의미에서, 때로는 어느 면에서 문화적인 의미에서까지도 그 주체성, 말하자면 그 고유한 권리인 ‘주권’이 상실되어 있는 경우가 이따금 일어난다.
여기서 재천명할 일은 어느 사회 집단도, 예컨대 어느 정당이 유일한 사회 지도자의 역할을 독점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전체주의 형태에서도 일어나는 바와 같이 필히 개개 시민들의 주체성은 물론 사회의 진정한 주체성의 파괴를 초래하는 까닭이다. 그 같은 상황하에서는 입으로야 제아무리 상반되는 구호를 외친다 하더라도 개인과 국민이 ‘객체’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현세계에는 다른 많은 형태의 가난이 존재한다는 점을 첨부해야 하겠다. 가난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결핍 내지는 박탈이 있지 않던가? 인간 권리의 부인 또는 제한, 예를 들어 종교 자유의 권리, 사회 건설에 참여할 권리, 단결을 하고 단체를 조직할 자유, 경제적 문제에 창의성을 발휘할 자유 등이 부인되거나 제한되는 경우, 물질적 재화의 결핍에 못지않게 인간 자체가 빈곤해지지 않던가? 그리고 이러한 권리의 충만한 시인을 배려하지 않는 개발이 과연 정말로 인간적 차원의 개발인가?
간단히 말해서, 현대의 저개발은 단지 경제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사회적 정치적인 것, 그리고 단순하게 인간적인 것이며, 이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이 이미 20년 전에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점에서 오늘의 이 현실이 개발에 관한 너무 협소한 개념에서 온 결과가 아니었는지, 말을 달리하자면 주로 경제적인 것으로 본 데서 기인하지 않았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16. 지난 20년을 두고 다수 선진국들과 개발 도상국들 그리고 국제 기구들이 사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아니면 적어도 그 징후의 일부나마 치유하려고 행한 칭찬할 만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현저하게 악화되어 왔다.
이러한 악화의 책임은 여러 가지 원인에 돌려진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개발 도상의 당사국들의 태만, 특별히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태만이 중대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선진국들의 책임을 못 본 체할 수는 없다. 그들은 자기네가 소속된 풍요한 세계로부터 격리된 나라들을 도울 의무를 늘상 느끼지 않았거나 적어도 느껴야 할 만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경제적 재정적 사회적 메커니즘의 존재를 고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메커니즘은 인간들에 의해서 조종됨에도 불구하고 흔히는 거의 자율적으로 움직이다시피 하며 소수의 부를 강화하고 나머지의 빈곤을 아울러 악화시킨다. 이 메커니즘은 직접 간접으로 선진국들에 의하여 조종이 되는 것으로 그 기능 자체가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한다. 그러나 결국은 저개발국들의 경제를 질식시키거나 좌우하기에 이른다. 뒤에 가서 이 메커니즘을 두고 윤리 도덕적 관점에서 주도 면밀한 분석을 해야 할 것이다.
[민족들의 발전]은 그 같은 체제하에서는 부자들의 부가 증대되는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은 여전하리라고 이미 예견한 바 있다.33) 이러한 예측이 들어맞았다는 증거로 소위 제4세계가 출현하였다.

17. 세계적으로 본 사회상이 제1, 제2, 제3, 심지어는 제4 세계라는 진부한 표현이 나올 만큼 분열된 표징을 보인다 할지라도 그 세계들의 상호 의존은 여전히 긴밀하다. 이 같은 상호 의존을 도덕적 요구에서 분리시킬 경우에 그 약자에게는 파탄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오직 도착적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이 메커니즘의 내부에 들어 있는 일종의 추진력의 결과로 말미암아 이 상호 의존은 부강국 내에서도 부정적인 효과를 유발한다. 바로 이들 국가에서, 비록 정도는 약하지만, 저개발의 더욱 특이한 양상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개발이라는 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동으로 혜택을 나누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꾸준한 진보를 보이는 지역에서까지도 퇴보의 과정을 겪거나 둘 중의 하나임이 분명해진다. 이것은 진정한 개발의 성격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셈이다.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참여를 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참다운 개발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개발은 선진국들까지도 점차 타격을 미치고 있는데 저개발의 특이한 표징들 가운데 비극적인 상황을 보이는 특별한 표징 둘을 들 수 있다. 첫째는 주택의 위기이다. 국제 연합이 세계 무주택자들의 해로 선언한 이 해에 적절한 주거가 없거나 아예 집이 없는 수백만 인간들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의 양심을 일깨워 개인이든 가정이든 사회든 부정적인 결과를 끼치는 이 심각한 문제에 해결을 찾기 위함이다.34)
주택의 결핍은 전반적으로 겪고 있는 일이며 점증하는 도시 집중의 현상에 크게 달려 있는 문제이다.35) 최고도로 발전하였다는 국민들까지도 글자 그대로 머리 위에 지붕이 없이, 또는 지붕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도 부적당하여 도무지 지붕이라 일컬을 수조차도 없는 상황에서 글자 그대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개인들과 가정들의 서글픈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주택의 결핍은 그 자체가 극도로 심각한 문제일 뿐더러, 그 성격이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또는 단순하게 인간적이라 할 일련의 그 모든 과오들의 표지 내지는 요약이라고 보아야 한다. 문제가 얼마나 광범위한지 생각한다면 우리가 민족들의 참다운 발전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쉽사리 알 수 있을 것이다.

18. 대다수 국가들에 공통된 다른 지표는 실업 또는 불완전 취업의 현상이다.
공업 국가들에 대두되는 이 문제의 현실성 내지 점증하는 심각성은 누구나 아는 바이다.36) 개발 도상국에서는 그 높은 인구 증가율과 그중의 태반이 젊은층이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실업 문제가 경종을 울리는 상황인 데 비해서, 고도의 경제적 발전이 된 국가에서는 노동원이 감소되고 있는 추세이며 그로 말미암아 취업의 기회가 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줄고 있다.
이 현상 역시 남녀 인간이 지녀야 할 자부심을 상실하는 굴욕감으로 인해 개인과 사회에 일련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데, 지난 20년을 두고 추진되어 온 개발의 성격 내지 유형에 관해서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회칙 맛노동하는 인간맜의 다음 말이 참으로 적절할 것 같다. “이 발전에 있어서 건설적인 요소, 교회가 천명해 왔고 이를 위해…끊임없이 기도해 온 정의와 평화의 정신으로 그 발전을 평가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모든 노동의 객관적인 목적성에서 그리고 모든 노동의 주체, 즉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노동에 대한 지속적인 재평가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를 극도로 당혹하게 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 사실이란…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실직 또는 불완전 고용 상태에 있고…이는 개별 정치 공동체 안에 그리고 대륙적 세계적 차원의 관계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극히 중대한 핵심 문제인 노동과 고용의 조직과 관련하여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해 주는 사실이다.”37)
이 두번째 현상은 앞에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갈수록 심화될 것으로서, 오늘날 목격하고 있는 민족들의 발전의 위상과 성격에 관한 극히 부정적인 표징이다.

19. 세번째 현상도, 비록 어디서나 목격하는 것은 아니지만, 똑같이 극히 최근의 특성을 띠는 것으로 선진국과 저개발국 사이의 상호 의존을 가리키는 지표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것은 국제 부채의 문제로서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가 이미 관계 문서를 공표한 바 있다.38)
이런 종류의 문제 - 그 점증하는 심각성은 이미 [민족들의 발전]에서 예측한 바 있다39)- 와 민족들의 발전이라는 문제 사이에 있는 긴밀한 연관을 아무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개발 도상국 국민들로 하여금 풍부하게 쓸 수 있는 자본의 제공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만든 동기는 그 돈을 개발 계획에 투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다. 그리하여 자금의 공여와 이것을 부채로 받아들이는 일은 개발에 기여하는 것으로, 비록 아마도 현명하지 못하고 때로는 성급한 일이 없지 않으나 그 자체로는 바람직하고 정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채무국 내부에서와 국제 금융 시장 내에서 정황이 바뀌어짐으로써, 짐짓 개발에 기여하는 것으로 채택된 수단이 역효과의 메커니즘으로 변신하였다. 이것은 채무국들이 부채를 이용하기 위해서 자기네 생활 수준을 개선하거나 적어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수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같은 이유에서 그들이 새로운 재정 투자, 앞에서와 똑같이 불가결한 재정 투자를 얻어내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통해서 민족들의 발전을 의도한 수단이 개발을 저지시키는 장치로 바뀌었고 어떤 경우에는 저개발을 악화시키기도 하였다.
최근의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의 문서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40) 이러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민족들의 상호 의존의 도덕적 성격을 두고 숙고하도록 요청한다. 아울러 같은 노선에 입각하여 개발 문제에 협력하는 일에 있어서 도덕적인 원리에서 오는 요구와 조건을 두고 깊이 숙지하도록 요청한다.

20.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지표들은 커다란 희망을 고무시켰음에도 그와 상반되는 지연, 개발 과정에 있어서 심각한 지연이 보이는 이유를 검토한다면 우리의 관심은 오늘의 상황에 관한 정치적인 이유로 쏠리게 된다.
참으로 복잡 다단한 요인들이 교차하는 문제이므로 우리가 여기서 포괄적인 분석을 행할 수 있을 것으로 바라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래의 정치 판도에 일어난 충격적인 사실, 민족들의 발전이라는 전향적인 움직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실을 모른 채 넘어갈 수도 없다.
본인이 하는 말은 대치되는 두 블록의 존재이다. 대개는 동서 진영이라고 일컫는다. 이런 서술이 나오는 이유는 단순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고 말 그대로 지정학적인 것이다. 이 두 블록은 제각기 다른 국가들, 또는 국가군을 자기에게 동화시키거나 주변에 모으고자 한다. 물론 그 귀속이나 참여의 정도가 다양하다.
그 대치는 우선 정치적이다. 각 블록이 사회를 조직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으며 다른 블록과는 양자 택일의 상반된 체제로 의식하는 까닭이다. 그 대신에 정치적 대립은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띠는 더욱 깊은 대립에서 기원한다.
서방 진영에는 자유 자본주의의 원리에서 역사적으로 영감을 받은 체제가 있는데 자본주의는 지난 세기에 산업화와 더불어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동방 진영에는 마르크스 집단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체제가 존재하는데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 관한 특수한 해독에 비추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여건을 해석한 데서 유래한다. 두 개의 이데올로기는 제각기 인간과 그의 자유 그리고 사회적인 역할에 관한 상이한 견해에 근거를 두고서 경제 영역에서 정반대되는 노동 조직의 형태와 소유 제도 특히나 이른바 생산 수단에 관련된 소유 제도 형태를 주창하였고 지금도 촉진하고 있다.
적대적인 체제와 세력권이 발전하고 각기 자기 고유한 선전 수단과 교조를 갖추고 있는 이상,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불가피하게 점증하는 군사적 대립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는 두 개의 군사력의 블록을 만들어내어 서로 상대방의 제패를 의심하고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
국제 관계 역시 이 ‘블록의 논리’, 그리고 거기서 오는 ‘영향권’이라는 결과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부터 시작된 두 블록간의 긴장은 그 뒤의 40년을 송두리째 지배하였다. 때로는 ‘냉전’의 형태를 취하고 때로는 지역 분쟁을 조종하는 식으로 ‘대리 전쟁’의 형태를 취하였고 때로는 노골적인 전면전의 위협을 갖고서 국민들의 마음을 전율과 불안 속으로 몰아넣곤 하였다.
현시점에서는 이 위험이 물러간 듯하지만 완전히 자취를 감추지는 않았으며 핵무기 중의 한 가지 종류를 파괴하기로 1차 협정이 맺어지기는 하였으나 블록의 존재와 대립은 여전하고 지금도 세계 판도를 특징짓는 불안한 현실로 남아 있다.

21. 이것은 개발 도상국들에 관련된 국제 관계에서 각별하게 부정적인 결과를 자아낸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동서간의 긴장은 두 가지 상이한 개발 수준간에 일어나는 대립이 아니고 개인과 민족들의 발전에 관한 두 가지 상이한 개념들간의 대립이기 때문이며, 양개념 모두가 불완전하고 철저한 수정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이런 대립이 개발 도상국들에 전가되고 그 때문에 남과 북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경제 수준의 격차를 더욱 확대하는 역할을 하고, 이런 격차는 선진 세계와 후진 세계라는 두 세계 사이의 거리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정황으로 말미암아 이 교회의 사회 교리가 자유 자본주의와 마르크스 집산주의 양편에 다같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발이라는 견지에서 자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체제가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과 민족들의 진정하고 총체적인 개발에 좋은 조건을 마련하거나 촉진할 만큼 어떤 방도로 또 어느 범위까지 변화와 쇄신을 받아들일 여지가 있는가? 실상 이런 변화와 쇄신은 시급할 뿐더러 만인에게 공동의 발전을 이룩하는 데에 본질적인 것이다.
최근에야 독립을 성취한 국가들, 그리고 자기 고유의 문화적 정치적 신원을 확립하려고 노력하는 국가들, 따라서 부강하고 발전된 모든 국가들로부터 효과적이고 편파성 없는 원조를 필요로 하는 국가들이 이데올로기의 갈등에 말려들거나 때로는 그 밑에 짓눌리게 되며, 그것은 불가피하게 내부적인 분열을 조성하고 심하면 전면적인 내란으로 번지고는 한다. 이런 현상은 개발을 위한 투자와 원조가 본연의 목적을 이탈하여 그런 충돌을 조장하는 데에 쓰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 투자나 원조에서 혜택을 입어야 할 국가들의 이익과는 달리, 흔히는 정반대로 악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들 중의 다수가 일종의 신식민주의 형태에 희생물이 될 위험을 점차적으로 의식하고 거기서부터 탈출하고자 시도한다. 바로 이러한 자각 때문에 그 많은 곤란과 때로는 모순 속에서도 국제 비동맹국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운동은 그 긍정적인 측면에서 각국민으로 하여금 자기의 고유한 동질성, 독립, 안녕 그리고 평등과 연대성에 입각하여 만인에게 돌아갈 재화에 참여할 권리 등을 효과적으로 주창하고자 할 것이다.

22. 이상에서 고찰한 바에 비추어 우리는 지난 20년에 관한 더욱 명확한 사진을 볼 수 있게 되며 북반구에서 일어난 충돌, 말하자면 동서간의 충돌이 남반구의 후퇴 내지는 침체의 중대한 원인이 됨을 확연히 파악할 수가 있다.
개발 도상국들이 만인에게 돌아가야 할 재화와 서비스에 당당하게 참여하는 방향으로 진보하는 문제에 있어서 자율적인 국가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기계의 한 부품 또는 거대한 바퀴의 톱니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사회 홍보의 영역에서도 일어나는 문제로서, 대개 북반구에 있는 센터들에 의해서 운영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국가들에 대해서는 우선을 거의 두지 않을 뿐더러 그 국가들이 처한 문제 또는 그들의 문화적 특질에 관해서도 합당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회 홍보를 장악하고 있는 기관들은 생활과 인간에 관하여 빈번하게 왜곡된 관점을 강요하기가 예사이며 따라서 참다운 개발의 필요에 호응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두 블록 다 자체 안에 보통으로 말하는 제국주의, 아니면 일종의 신식민주의 형태로의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역사를 포함하여 전체 역사가 가르치듯이, 그들이 빈번히 빠지는 유혹이 이것이다.
바로 이 비정상적인 상황, 전쟁 그리고 터무니없이 과장된 안보 의식의 결과로 만인이 인류의 공동선을 위하여 한데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가려는 충동을 말살시키고 만다. 그뿐 아니라 평화로운 민족들이 만인을 위해 있는 재화에 권리 당당하게 접근하지 못하게 방해를 받아 오히려 그들의 손해를 초래한다.
이렇게 볼 때에 세계의 현재와 같은 분열은 개발 도상국 또는 저개발국에서 저개발의 조건을 실제로 변혁하는 데 있어서 직접적인 장애물이다. 그렇지만 민족들이 언제나 자기 운명에 체념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군사 경비와 관료 제도 그리고 내부적인 비효율에 의해서 터무니없이 악화된 경제의 필요로 말미암아 현존하는 대립을 완화시키려는 절차가 생겨나고 유익한 대화와 평화를 위한 순수한 협력을 시작하려는 움직임이 만들어진다.

23. 무기 생산에 돌려지는 자원과 투자는 빈곤으로 추락해 가는 민족들의 비참을 덜어주는 데 쓰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주장은41) 두 블록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라는 호소를 더욱 절박하게 만든다.
오늘날에는 이 자원들이 각 블록으로 하여금 상대방을 제압하여 그것으로 자신의 안보를 보장한다는 식으로 쓰이고 있는 현실이다. 역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도적 역할을 할 가능성을 가진 국가들은 근본적으로 쓸모없는 이 왜곡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발전을 희구하는 민족들의 복지에 연대 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자기네 의무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게 된다.
국가들 사이의 지도적 역할은 더욱 넓게 또 더욱 관대하게 공동선에 이바지할 가능성과 이바지하려는 의사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함이 시의 적절하며 결코 과장이 아님을 천명하는 바이다.
한 국가가 스스로 폐쇄를 하고 국가들의 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월등한 위치와 거기서 오는 책임을 감당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그 국가는 자신의 도덕적인 의무를 중대하게 손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정황에서 현격하게 나타나는 사실로 거기서 신앙인들은 신적 섭리의 안배를 분별해 내고 있으며 섭리가 국가들을 이용하여 그 계획을 실현하시고 “만백성의 계교를 부수시는”(시편 33,10) 모습을 보게 된다.
서방이 갈수록 이기적인 고립의 형태에 자신을 맡겨버린다는 인상을 준다든가, 동방이 자못 의심스러운 명분을 내세우면서 인간의 비참상을 덜어주어야 하는 사명에 협력할 의무를 모르는 체할 때에, 그것은 단지 인류의 정당한 기대를 배신하는 것뿐 아니라 - 이런 배신은 예측 못할 결과를 불러올 전조이기도 하다- 그 도덕적인 임무를 유기하는 것이다.

24. 만일 무기의 생산이 인류의 필요와 그 필요를 충족시킬 만한 수단을 이용하는 데에 현세계의 심각한 무질서라고 한다면, 무기 거래는 똑같이 부끄러워해야 할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아니, 후자를 두고는 도덕적 판단이 훨씬 엄하여야 마땅하다.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이것은 국경이 없는 장사이며 심지어 블록의 장막까지 넘나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하면 동방과 서방의 분단을 초월할 줄까지도 알며 무엇보다도 남북간의 분단까지도 넘나들어 남반구를 좌우하는 각급 분야에까지 판로를 뚫고 들어가는데 이 점이야말로 참으로 심각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이한 현상에 직면하게 된다. 경제 원조와 개발 계획은 도저히 극복 못할 이데올로기의 장벽에 부딪히고 관세와 무역 장벽에 부딪히는 데에 비해서 무기만은 그 출처가 어디든 상관없이 거의 완전한 자유를 구가하면서 전세계를 휩쓴다. 그리고 국제 부채에 관해서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가 최근에 발표한 문서가 지적한 바와 같이,42) 많은 경우에 선진국에 의해서 대부된 자본이 저개발 세계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데 사용되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만약 여기에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축된 원자 무기로 대표되는 저 위험, 가공스럽고 전세계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위험을 보탠다면, 다음과 같은 논리적인 결론이 나오게 된다. 경제가 발달된 세계를 포함해서, 오늘의 세계에서는 지배적인 상황이 진정한 개발에 대한 관심 쪽보다는 죽음을 향하여 우리를 몰아가게 결정되어 있다. 회칙 맛민족들의 발전맜에서는 참된 진보야말로 만인을 ‘더욱 인간다운’ 삶으로 이끌어갈 것으로 예시했다.43)
이러한 사태에서 나오는 결과는 현대 세계의 불균형과 분쟁을 특징짓고 폭로하는 상처에서 적나라하게 엿볼 수가 있다. 전쟁, 자연 재해, 각종 박해와 차별이 집과 직장, 가정과 조국을 박탈당한 수백만 피난민들이 바로 그 상흔이다. 이 많은 인간들의 비극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의 희망 없는 얼굴, 갈라지고 야박한 세계에서 안주할 곳을 더 이상 발견 못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생생히 반영되어 있다.
또한 우리는 현대 세계의 고통스러운 다른 상처 하나를 눈감고 지나칠 수가 없다. 테러라는 현상이다. 사람을 죽이고 무차별하게 소유물을 파괴하고 공포와 불안의 분위기를 조성하며 때로는 인질까지도 포함하는 활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록 때로는 더 나은 사회를 창조하겠다는 이념이나 원의가 그 동기로 작용한다 할지라도, 테러리즘의 행동은 결코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 같은 결정과 그 같은 행동이 그 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죄한 사람들을 대량 살륙하는 데로 나아가면서, 더 궁극의 이유를 지향하는 선전적인 목적을 갖는 것처럼 주장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것은 더욱 정당화될 수가 없다. 더구나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단순히 죽일 목적에서 살인을 범하는 경우는 더욱 나쁘다. 이처럼 가공할 고통스러운 정황 앞에서 본인이 수년 전 했던 그 말이 여전히 맞는 말이요 이를 다시 여기서 되풀이하고자 한다. “증오에 의해서, 무방비 상태의 인간들을 죽임으로써, 테러리즘의 수단에 의해서 해결을 찾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금하는 바이다.”44)

25. 인구 문제에 관해서, 또 오늘날 이 문제를 두고 말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하여야 할 것 같다. 바오로 6세가 그의 회칙에서 언명하고45) 본인도 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에서46) 주장한 바에 근거하여 말을 하겠다.
인구 문제가 있고 특히 남반구에 인구 문제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으며, 그것이 개발에 어려움을 조성하고 있다. 그런데 북반구에서는 이 문제의 성격이 역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즉시 덧붙여야 하겠다. 이 지역에서는 우려의 원인이 출생률의 저하이며 그것이 인구의 노령화라는 파급 효과를 내고 생물학상으로 이를 회복시키기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 자체로는 이것도 개발에 지장을 줄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런 곤란이 오직 인구 성장에서만 유래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도 옳지 못하듯이, 모든 인구 증가가 꾸준한 개발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도 바른말이 아니다.
다른 면에서, 여러 국가에서 정부가 산아에 반대하는 조직적인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해당 국가의 문화적 종교적 독자성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진정한 개발 자체에도 상반된 것이다. 흔히는 이런 캠페인이 해외로부터 오는 압력의 결과이고 해외에서 오는 재정으로 추진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재정적 경제적 원조와 보조를 제공하는 조건이 되는 수도 있다. 여하튼 당사자 남녀의 선택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 절대 결여되어 있으며, 그들이 이 새로운 형태의 압제에 굴종하도록 강박하려는 의도에서, 당사자들에게 경제적인 압력을 위시한 용납 못할 압력을 가하고 있다. 대개 그런 학대를 받는 사람들은 가장 빈곤한 주민들이며 때로는 그것이 인종 차별의 형태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이거나 인종 개량이라는 똑같이 인종 차별의 성격을 띠는 형태로 조장된다.
이 사실도 강력한 단죄를 받아야 할 것으로 진정 인간다운 발전에 대한 그릇되었거나 전도된 관념의 표지이다.

26. 주로 부정적인 각도에서 현대 세계에서 보이는 개발의 현황을 개괄하였는데, 만일 긍정적인 측면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고찰이 미완성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첫번째 긍정적인 신호는 수많은 남녀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자기의 존엄성과 각자의 존엄성에 대한 완전한 각성이다. 이 자각이 표현되기로는, 예를 들어 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생한 관심이며 인권의 유린에 대해 더욱 격렬하게 반발하는 행동이다. 그 표시 중의 하나가 근자에 결성된 그 많은 사설 단체이니 어떤 것은 범세계적인 회원을 갖고서 이 예민한 영역에서 국제적으로 발생하는 바를 면밀하게 또 권장할 만한 객관성을 갖고서 감시하고 있다.
이 방면에서는 40여 년 전에 국제 연합에 의해서 선포된 인권 선언이 끼친 영향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권 선언이 존재하고 국제 공동체에 의해서 점차 채택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이 의식이 점증하는 증거이다. 또한 인권의 분야에서 국제 연합 또는 다른 국제 기구들이 창설한 다른 사법적인 수단들을 들 수 있겠다.47)
이러한 각성 문제는 개인들에게만 해당하지 않고 국가들과 민족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이니 그들은 특정한 문화적 주체성을 갖고서 자신의 귀중한 유산을 보존하고 자유롭게 발휘하고 촉진하는데 특히 예민하다.
이와 동시에 분열되고 각종 분쟁으로 얼룩진 세계에서는 철저한 상호 의존에 대한 확신, 그 상호 의존을 용납하여 도덕적인 차원으로 전이시킬 연대성이 필요하다는 확신이 증가하고 있다. 오늘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인간들이 공동의 운명으로 서로 결속되어 있음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또 만인에게 닥칠 재앙을 피하려면 이 공동 운명을 함께 건설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식이 팽창하고 있다. 불안과 공포, 현대 세계의 전형적인 현상이라 할 마약 같은 도피적 현상 한가운데서 하나의 이념이 서서히 부상하고 있으니, 우리 모두가 부름받은 선이며 우리 모두가 동경하는 행복은 모든 사람 편에서 노력과 투신을 하지 않고는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여기서는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을 뿐더러 따라서 개인적인 이기심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자리에서 언급할 바는, 낙태와 안락사 등에 의해서 생명을 파괴하는 온갖 유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표시로 평화를 위한 관심이 동시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평화는 불가분한 것이라는 의식도 대두되고 있다. 모두가 평화를 누리거나 아무도 못 누리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평화는 갈수록 정의를 엄정하게 존중하도록 요청하며, 따라서 진정한 개발의 성과를 공정히 분배하도록 요청한다.48)
오늘의 긍정적인 표지 중에는 이용 가능한 자원의 한계에 대해서, 자연의 주기와 통일성을 존중하여야 할 필요에 관해서, 개발을 계획함에 있어서 자연에 관하여 선동적인 관념을 갖고서 이 주기와 통일성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에 관해서 자각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이것을 가리켜 생태학적 관심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가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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