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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21세기 종교 상황과 선교 (0)
작성자 : 복음화위원회
등록일 : 2008.03.01 13:01
조회수 :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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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종교 상황과 선교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인류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진보 발전된 과학 기술 문명의 이기를 만끽하면서 살게 되었다. 과학과 기술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영적인 것을 수용하고 믿기보다, 증명할 수 있고, 오관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세태(世態)가 만연하게 되었다. 고대로부터 전통적으로 전수되던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던 인간 이성의 체계는 그 중심 되는 관건을 오직 또 다른 ‘유물주의(唯物主義)’에 의해 한정하기 시작하였다. 곧 인간이 만나는 모든 현상과 사건 안에서 지배적인 입지를 차지하게 된 것은 유신론적인 것이 아닌 유물론적인 것으로 변화되었다. 물신주의 기준에서 사물을 바라보게 됨으로써 결국 인간은 당연한 귀결을 만나게 되는데,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현대인의 자유추구란 것도 결국 무익하고 공허한 자유, 자유자체를 위한 자유, 방종과 감각적 쾌락의 허무한 추구 정도로 곧잘 끝나버리는 양태를 띠게 되었다. 근대의 계몽주의적 합리주의는 반종교적 합리주의로 출발하였으나, 오늘날 서구의 반종교적 세속주의, 이기주의, 물질주의, 경쟁주의, 과학주의, 배금주의 등으로 변화되어 새로운 위기의 딜레마를 낳게 되었다. 소위 현대인의 위기라는 것은 현대인의 정신적 삶의 위기이며, 이것은 종교의 위기와 어우러져 종교 철학과 개인 및 사회 집단 공동의 신념의 위기와 긴밀하게 관련된다.
인간 역사와 함께 시작된 종교는 인간의 절대적이며 존재론적인 문제와 연관된 정신체계이며, 종교적 신념은 궁극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한 종교를 수용하게 되면, 다른 종교들을 질시하고 거부하게 되며 자신의 종교 안에 안주하게 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세계의 위기와 함께 인류문명의 급속한 발달로 인하여 점차 좁아져 가며 하나의 촌락으로 변해가는 지구촌 시대를 맞이하면서, 과거 지리적으로 시간적으로 별리되어 있던 종교들의 세계가 상호 만나고 의식하게 되며 서로의 존재를 감지하게 되었다. 한 지역이나 국가와 민족 안에 여러 종교가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면서 동시에 현존하게 되는 이른바 종교 다원화 시대를 접하게 되었다. “문화적 차이나 종교적 다양성에 대한 의식은 이제 몇몇 인류학자나 종교학자들만의 것이 아니고 하나의 보편화된 상식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종교 다원주의나 문화 상대주의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명한 결론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는 불가피하게 종교 상대주의를 태동시키고, 종교 동등화를 초래하게 한다. 전통적으로 오직 유일신 사상으로 체계화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종교 상대주의는 커다란 도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서 먼저 고찰하고 이어서 다원화된 종교 시대에 있어서 전통적 의미의 교회 선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종교다원주의

20세기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종교를 인간 삶의 중심으로 이해하면서, 자신이 추적한 26개의 문명권의 특징과 각 문명권의 역사적 과정에서 민족들 스스로 정치적․도덕적 도전에 대하여 응전하게 하였던 그 원동력은 이들이 향유하였던 종교의 특질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고등종교인 소승불교․대승불교․힌두교․유태교․이슬람교․그리스도교에 나타난 영적인 초월적 실재는 모두 하나같이 우주 안에 있으면서, 우주와 동일시되지 않는 실존으로 발견된다고 서술하였다. 모든 경계와 구분을 점진적으로 초극해 가는 세계사적 거대한 조류 앞에 이들 고등 종교계 역시 그 고유한 영역의 빗장을 열고 다른 종교와 조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같은 의미에서 인류는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초유의 다원적 종교 시대의 도래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제반 지성계 안에서 과학, 기술계와는 달리 절대적 확신을 그 근간으로 하는 종교계에서 그 절대성을 포기․양보하고 타종교 안의 고유한 초월자를 인정하도록 요청하는 종교 다원주의는 종교사적(史的) 관점에서 하나의 충격적 전환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전환은 현금(現今)의 동시대적인 여러 변화와 맞물려서 등장하는데, 조화․공생(共生)을 추구하는 환경에 대한 관심에 의해서, 또한 서구사상 중심에서 동양사상과의 공조함을 통해서, 그리고 획일화되고 폐쇄적인 사회문화와 생활양식으로부터 각 개인의 고유한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유분방한 의식으로의 변모와 더불어서, 총체적으로 개방된 사회로의 전환을 지향하고 있다 하겠다.
근대 시민사회와 함께 주어진 신앙의 자유와 함께 종교의 다원성은 앞으로 전개될 본격적인 정보화, 세계화 사회 속에서 보다 더 심화될 것이다. 특히 주관적인 개인 심성에 좌우되던 종교의 자유는 단순히 근대적인 신앙 선택의 자유를 넘어서 종교간의 경계선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복합적이며 창조적인 신앙으로 변모될 것이다. 21세기의 종교는 열린 종교가 될 것이며 고등 종교의 신앙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단 하나만의 전통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다전통적 신앙의 유혹을 받는 종교사상(史上) 유례없는 변화와 갈등의 시대가 나타날 것으로 보여진다.
“한때 우리는 ‘기독교를 알고 있는 이는 모든 종교를 알고 있다’(하르낙)고 하였으나 그리스도교 이후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오늘날 막스 뮬러처럼, ‘오직 하나의 종교밖에 모르는 이는 어떤 종교도 모른다’고 하여야 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밖에 모르는 이는 사실 그리스도도 모르는 이다’(월터 호오톤)라고 할 만큼 종교 다원주의 시대를 인정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타종교에 열린 자세를 취함으로써 지구상에서 문화적․언어적․지리적 경계선이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는 오늘날 종교가 추구할 새로운 지표를 제공하였다. 교의헌장은 타종교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 복음 및 그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신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인정된 신의 의지를 은총의 역사 속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 … 아직 신을 분명히 인정하지 않으나 신의 은총에 받들어져서 올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신은 그 섭리에 근거하여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는다”(16항).
오늘날과 같은 종교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를 넘어 다른 종교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요구된다. 다른 종교에 대한 관대한 이해를 통해서 타종교 안의 성스러운 가치와 도덕적 가치를 만나게 되고, 나아가 자신의 신앙체계를 보다 풍요롭게 넓힐 수 있다. 자신의 종교 본위의 독선과 자기폐쇄는 다른 종교가 갖고 있는 전통적이며 훌륭한 도덕적인 가치도 과소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 그것은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여러 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더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내지 윤리적인 선과 사회적 내지 문화적인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시키기를 모든 자녀들에게 권하는 바이다”(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
신학자 한스 큉에 의하면 지구의 궁극적 평화는 종교의 평화 없이 이루어질 수 없고, 종교의 평화는 종교의 대화 없이 실현될 수 없다고 보았으며, 종교간의 대화 없는 지구의 윤리체계는 불가능한 것이며, 종교간의 대화에 지구촌 최후가 달려있다고 하였다. 종교간의 상호 내면적 이해가 종교간의 대화목적이 되고 종교의 중요한 공통된 사명으로 요청되겠지만,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가 대화 자체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종교의 공통된 존재이유(raison d‘etre)인 인류의 전인적 구원을 위해서 함께 협력할 것이 무엇인지 공동으로 탐구해야 할 것이다. 아메리카 발견 400주년 기념행사의 세계종교대회 의장이었던 찰스 보니 역시 다원 종교의 공동역할에 있어서 세계종교는 종교들 사이에서 서로 싸워서는 안 되고, 이제부터 인류를 괴롭히고 있는 거대한 공동의 악들에게 대항해야 한다고 피력한 바 있다. 곧, 종교간의 화합과, 교류, 협력을 위해서는 종교 간의 대화에만 연연하여 안주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되며, 인류세계 안의 다원적 종교들은 협력과 공동노력을 통해서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결집하여 인류의 공통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힘쓰도록 시대적 요청을 받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세계종교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가치중의 하나는 사랑과 자비라는 선(善)이다. 어느 종교가 참된 진리의 종교인가라는 진리에 대한 물음보다는 어느 종교가 참으로 신의 뜻을 구현하고 인류를 위하는 선한 윤리종교인가 하는 선(善)에 대한 윤리적 물음이 우선된다 하겠다. 어느 종교의 창시자도, 종교가 종교의 모습으로 항구하기를 지향하는 한, 그 종교의 이론과 교조, 원리를 그 존재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무릇 고등 종교라 함은 그 종교가 사람들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삶 자체를 개선시켜 올바르고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삶으로 옮아가도록 하는데 그 창립의도가 있다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론 전개와 논리 계발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하는 삶 속의 실천이며 구체적인 수행(修行)인 것이다. 가톨릭 종교학자 롯시노도 관찰하기를 어느 종교에도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윤리적 선에 대한 교훈이 있다고 하였다. 인류에게 있어서 정통교회를 수용하라고 하는 것보다는 정통행위에서 일치하고 협력하자고 하는 편이 보다 필요한 과제가 아닌가 라는 극히 현실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신학은 세계 도처에서 근본주의 신학자들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지고 배타적이며 소승(小乘)적인 구원관을 극복하여 참신한 새로운 대화문화, 협력문화, 지구 생명윤리로 향하는 다원주의 구원신학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3. 다종교(多宗敎) 시대의 선교현실

물질주의가 가속화되는 까닭으로 종교의 역할과 영향력이 감소해 가는 와중에, 더구나 종교의 다원화 시대가 도래하게 됨에 따라, ‘최고의 가르침’〔宗敎〕이라는 종교마저 전통적으로 봉사와 섬김에서 인정받아 오던 권위가 실추 당하게 되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신앙인다운 삶의 모습이 아니라 비신앙인에게서 오히려 영향을 받아 더욱 세속화되어 가며 물질적인 가치에 더욱 의지하고 거기서 위안을 찾고 안주하려는 경향이 많아 졌다. 사실 한국 사회 안에서도 안락사와 낙태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가 확산되고 이혼율이 급속도로 늘고 있으며, 사회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일회용 소모품으로 다뤄지고 가정 안에서 생명의 존귀함은 행복을 방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가진 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갖가지 범법 사실들이나 부정한 짓들을 합법화시켜주는 법조계의 비리, 갖가지 퇴폐 현상들, 출판과 방송, 영화계의 윤리실추와 인명 경시 풍조들, 식품, 제약, 의료업계에까지 만연된 부정과 비리들, 시민들의 열화 같은 낙천요구를 도외시한 채 공천하는 정치계, 특히 온갖 공약(空約)을 남발하여 백성들을 기만하는 정치가들, 노동자들의 임금 지불에 인색하여 감봉과 체불을 일삼거나 퇴출을 강요하는 기업가들, 해묵은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총선 선거운동, 부동산 투기나 주식투자 돈놀이를 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겨 사치와 향락으로 치닫는 졸부들, 참으로 굶주리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들보다는 비교적 나은 직장에 있는 노동자들이 만들어 내는 노사분규들, 등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우리 사회 안에 ‘죽음과 비복음적 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 현상에 대하여 소극적이고 무사안일하게 대치하고 침묵만 유지함으로써 짠맛을 잃은 소금과 빛을 잃어가는 등불로 전락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은 일생을 통해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을 걸어 인생의 궁극 목적인 하느님께 도달해야 한다. 무한하신 하느님은 인간을 한없이 초월하시는 분이시기에, 인간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하느님 도우심 없이 인간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도록 인간의 길을 비추시고 인도하신다. 그 도우심은 하느님을 갈망하는 곧, 인간 내면에서부터 하느님께로 향하는 번뇌를 통해서 이끌어주신다고 하겠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은 다음과 같이 이 문제를 말한다. “사람들은 어제도 오늘도 인간의 마음을 번민케 하는 인생의 숨은 수수께끼들의 해답을 여러 가지 종교에서 찾고 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의와 목적은 무엇인가? 선이 무엇이고 죄는 무엇인가? 고통의 원인과 목적은 무엇인가? 진실한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는가? 죽음은 무엇이고 죽음 후의 심판과 판결은 어떨 것인가? 마침내 우리 자신의 기원이자 종착역이며 우리의 실존을 에워싸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마지막 신비는 과연 무엇인가?”(1항) 물질감각적 세계에 몰입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욱 영적으로 공허함과 허무를 느끼게 되어있다. 보이는 것으로 채울 수 없는 불가시적인 그 무엇을 인간은 추구해야 하는 존재론적 공허(空虛)를 심유(深有)하고 있다. “인간의 영원성은 종교적 체험에 대한 항구적 가능성이며, 인간 자신의 존재 구조를 통하여 이를 지니게 된다. 이 구조를 분석해 보면 인간은 단순한 자연현상 이상의 존재임이 밝혀진다.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이며 또 그런 한에 있어서는 신의 형상을 지니고 신을 추구하는, 그리고 신에 대해 반응할 줄 아는 존재이다.”
최근에 교회는 신자들이 신앙과 생활의 유리(遊離), 복음과 문화의 분리로 인해 빚어지는 결과들을 심각하게 우려하였다. 이러한 분리현상은 종교 다원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더 더욱 신앙을 사회의 일상적인 생활 안에서 분리하여 특히 주일날에 한정하여 이뤄지는 일상생활 가운데 하나의 별난 행동으로 축소하게 하며, 하느님을 이 세상의 현실과는 분리되어 별도로 존재하는 분으로 여기는 오류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교회는 신앙과 문화에 대한 조화와 통합 및 일치, 복음의 토착화, 현대화를 성취하도록 꾸준히 노력하며 촉구해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화해야 할 사회로부터 오히려 역습 당하며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 오늘, 이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앙과 생활의 통합과 일치를 위한 교육이 조속히 그리고 항구하게 계속되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한국사회는 그동안 자본주의 경제체계와 경쟁주의를 지향하면서 효․능률과 합리성의 추구라는 경제우선주의를 첫 자리에 두고 달려 왔다. 산업화, 물질주의로 인한 사회의 가치혼란 속에서 교회 역시 이를 복음화하기 보다 오히려 물질주의화(物質主義化) 당한 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종교 다원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교회구성원 모두는 이점을 깊이 성찰하고 반성하여 새롭게 거듭나도록 요청받고 있다 하겠다.


4. 다종교 시대의 선교의미

다종교 시대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방황하고 영적인 갈증을 느끼는 현대인이 기쁨과 은총의 2천년 대희년을 맞이하고 있는 이때는 참으로 선교의 새로운 호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선교와 복음화의 의미를 분명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교회 용어에서 선교(missio)란 표현보다는 복음화(evangelizatio)란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선교와 복음화가 때로는 같은 의미로, 때로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본래 복음화란 주로 선교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복음 선포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지만, 1974년 10월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제3차 세계 주교 대의원 총회(synodus)의 주제로 “복음화”가 확정됨에 따라 그 의미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재해석하게 되었고 선교를 대신하는 공식 용어가 되다시피 하였다. 복음화는 복음 선포의 의미는 물론이고 구원 계획에 위반하는 모든 인간적인 판단 기준, 사상의 동향, 그리고 가치관과 생활 양식 등을 변화시켜 복음적 생활로 인도하는 활동까지를 폭넓게 의미한다. 결국 복음화는 이 세상을 창조주와 구원자의 뜻에 부합하도록 총체적으로 개선해야 할 교회의 사명과 활동 전체를 말한다. 이러한 복음화 개념이 바로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추구하고 구현해야 할 과제라 할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는 전통적으로 안주해 온 각각의 고등 종교의 삶에 새로운 긴장을 유발함으로써 고등 종교인들에게 인식의 지평을 새롭게 확장시키고 포괄적 발전을 초래하는 자극제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종교 다원주의 시대의 선교가 커다란 논쟁거리가 된 것이 사실이다. 다종교시대의 선교에 있어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는 쟁점은 “유일한 구세주” 문제이다. 비그리스도교가 대다수를 형성하는 민족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 유일한 구세주”라고 이 한 마디를 설파하는 것은 순교를 요하는 만큼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신앙고백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유일성 고백은 무너질 수 없는 신앙의 금자탑인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이기는 하나 유일한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는 다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인물들도 있다는 주장 또한 오류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의 선교사명〕회칙은 그리스도 신비의 여러 면모의 단일성을 언급한다. 또한 하느님 계획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종교들의 영성적 차원들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다른 종교들의 영성적 차원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계시이다. 현대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종교 다원주의 상황에서 보다 더 수용 가능하도록 재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채택하였다. 함축적 신앙(implicit faith)과 명확한 신앙(explicit faith)이 구분되었고, 잠재적인 교회와 현재화된 교회가 구분되었으며, 특히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의 공헌은 커다란 영향을 그리스도교 내외에 남겼다. 그의 신학은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지를 존중하면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양립시키려는 시도로서, 다음의 네 가지 명제로 압축된다. ⑴그리스도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절대적인 종교로서 자신을 이해한다. ⑵비그리스도교는 그 개인을 위해서 자연적인 신앙지식과 은총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가질 수 있다. ⑶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인을 익명의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대하여야 한다. ⑷교회는 스스로를 구원에 대한 권리를 가진 배타적인 공동체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현시되어 있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명백한 표현으로 여겨야 한다. 다른 종교에서의 하느님의 은총의 실재를 허용하는 라너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다른 종교인에 대해 관용적이고 겸손해야 하며,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의 근거를 간직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궁극적으로 종교의 존재 이유는 삶의 변화를 지향한다. 종교 다원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각 종교 신앙인들은 다른 종교들 안에서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종교를 더욱 신봉하고 그 가르침에 따른 교리를 실제 삶 안에 구현하도록 요청 받고 있다. 현학적인 이론과 교리가 종교와 신앙을 가진 사람의 종교적인 모든 것이 아니고 그 이론과 교리가 실제 생활 안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쳐서 일상생활을 보다 의미 깊도록 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절대자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과연 그 말씀을 얼마만큼 실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실천적 요소가 없다면 그야말로 교의와 논리에 대한 소모적이며 비극적인 싸움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타종교안의 초월적 절대자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인류를 위하는 마음으로 얼마나 실제 생활 안에 구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여러 종교들은 복수 다원적으로 존립하면서 전통적 영역을 넘어 참으로 인류를 위하는 종교이며 현세와 후세 어느 한편에만 편주(偏住)함이 없이 인류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갈망하는 그 영적이며 종교적인 목마름을 채우면서 인간 존엄성과 인류 공동체 삶의 품위를 얼마나 더욱 고양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복합다변의 현대 인류사회 안에서 다원 종교들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신앙인 단독자 각 개인이 향유한 신앙 결단의 주도권 영역을 무시하는 실책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교 안에서 세상 끝날까지 인류역사를 다스리고 이끄시지만, 또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교 안에서만 갇혀있지 않으시고 그리스도교 바깥까지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시다. 당신은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으며”(요한 14,6),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마태 28,18) 받으신 분이시다. 익명의 그리스도 이론과 불가시적 교회 이론에 대해서와 같이 너무나 호교론적이거나 포괄적이라고 종교 상대주의자들은 비판할지 모르나, 모든 인간의 구원은 오직 문(요한 10,7)이시며, 길(요한 14,6)이시고, 생명이시고 부활(요한 11,25)이신 그리스도 그분만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당시 사도들에게 또한 마리아와 마르타에게 던진 질문을 종교 상대적 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질문하신다: “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니까?”(마르 8,29), “당신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요한 11,26). 궁극적으로 다종교 시대의 우리 각 한사람 개인에게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유일한 구세주인가 아닌가 하는 점은 그분의 말씀과 삶 안에서 던져주신 메시지를 우리가 과연 얼마만큼 진실되게 믿고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발전하게 된다. 곧 그리스도 유일한 구세주의 문제는 신앙인 한사람 한사람이 그분을 자신의 유일한 존재론적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신앙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단순히 사회 도덕적,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관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요구되는 전통적, 관습적 차원에서 맺어지는 관계를 초월하는, 인간의 모든 제반 관계들 가운데 정수(頂首)를 점하는 관계이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면서도 아깝지 않는, 지키고 간직할 만한 그러한,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다. 만일 단순히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의 그리스도와의 관계였다면, 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였을 것이나, 파기할 수 없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였기 때문에 순교자들은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리면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는 각 개인의 이같은 믿음이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도 많은 유혹과 시련을 받게 되는 시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타종교와의 대화는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열려진 대화와 협력이 교회의 선교와 복음화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사랑의 하느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하여 보내주시고 희생 제물로 받아주셨다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또한 인류의 구세주로서 믿고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선의(buona volonta)의 사람들, 곧 하느님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곧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업을 듣고 믿게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듣고 신앙을 소유할 천부적(天賦的) 권한이 있는 것이며, 선교사들의 고유한 선교 임무가 구원사적(史的) 의미에서 여전히 중요시 되는 것이다.

5. 맺는 말
21세기가 시작된 오늘날은 기피하던 3D가 아닌 각광받는 3D(Digital, DNA, Design)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한다. 현대문명은 산업사회 시대를 보내고 정보화 사회를 맞이하고 있으며, 문화적 삶의 질을 높이려는 생활문화의 확장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자본과 정보, 사람과 문화 등 각종 교류가 전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정보통신기술의 혁명이 성취되고 지식정보문명, 개인중시문명, 다양한 공동체문명을 태동시키고 있다. 미래에는 종교가 개인의 소속감과 정체성 그리고 의미체계를 제공하며, 초월의 표징으로 드러나는 개인주의적 종교로 발전할 수도 있고 제도화된 종교가 쇠퇴하여 개인의 사적인 종교성, 이른바 종교의 사사화(私事化)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있으며, 고전적인 종교형태인 도덕성과 영성회복을 제창하는 근본주의적 종교운동이 다시 확대되거나, 새로운 현대적 구원을 강조하는 종교, 신비적 성격의 종교, 사회적 시민종교, 여러 가지 대용 종교의 개인적 차원인 ‘보이지 않는 종교’ 등 다양하게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고전적 고등종교가 어느 정도 변증법적인 변화를 겪은 후 다양한 형태의 종교가 선을 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느님 중심의 전통적 신관(神觀) 대신에 인간 중심의 새로운 르네상스의 인간관이 도래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 공생(共生)과 공영(共榮)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고 모든 제반가치의 준거와 목표를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하여 제반학문의 영역을 서로 넘나들면서 전문적 연구 분야의 경계를 넘어서 그 가치 척도를 새롭게 설정하고 인간의 발전과 성숙에 있어 참으로 긴요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면서 자유, 평등, 공영을 추구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종교는 이같은 인간 중심의 관점을 자신만의 이기적 차원을 이타적․공동체적․전지구적 차원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펼치고 증거하여야 할 것이다. “인류의 생존과 지구 보존의 환경문제가 되는 오늘날의 총체적․전반적 위기 앞에서 종교들이 사회적 대립과 분열을 넘어서서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힘으로 작용하며, 교리적 배타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이 주어지는 기회 앞에서 인류 공동의 위기를 타개해 나갈 힘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종교다원시대와 함께 복음화 제3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 교회는 내적으로 더욱 성숙하여 새롭게 도약할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의 도움과 희생을 요청하는 세계 교회와 함께 하나되어서 한국교회는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복음화에 보다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특히 같은 아시아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시아 대륙의 복음화에 대하여 부여받은 선교 책임과 사명은 막중하다 하겠다. 이러한 역사적 사명과 의무를 인류공동체와 함께 협력하여 수행하면서 교회구성원 모두 희망의 새로운 천년기를 맞아 교회 선교의 첫 걸음을 용기있게 내딛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다종교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초창기에 발휘되었던, 신앙 선조들의 생명이 다하도록 헌신한 그 숭고한 선교정신과 새 교우 영입정신을 다시 한번 발휘함으로써 이 땅의 복음화가 보다 넓게 확장되도록 모든 역량을 기울여 매진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교계 지식인계열은 우리 교회 선조들의 최초 선교활동이 이른바 당시 지식층에 의하여 주도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민족과 세계복음화에 보다 많은 식자(識者)들과 브레인들의 협력과 투신이 요청된다 하겠다.
결론적으로 21세기 종교 다원주의시대 사회에서 한국교회의 복음화율을 높이고 장기적으로는 미래의 통일 한국 복음화를 효과적으로 준비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이제부터라도 한국교회 구성원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아동까지 교회의 선교 사명을 깊이 자각하여, 교회 선교와 사회 복음화를 위해서 얼마나 구체적으로 일상생활과 지역사회 안에서 친교의 삶을 구현하며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하면서 살고 있는가 하는데 달려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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