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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하느님의 자비에 관하여 (0)
작성자 : 복음화위원회
등록일 : 2008.06.10 13:09
조회수 : 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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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자비에 관하여

모든 가톨릭 교회의
주교와 사제와 신자들에게 보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

DIVES IN MISERICORDIA


차 례

I. 나를 보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1. 자비에 대한 계시
2. 자비의 강생
II. 메시아의 메시지
3. 그리스도께서 행적과 가르침을 시작하셨을 때에
III. 구약성서
4. 자비의 개념
IV. 탕자(蕩子)의 비유
5. 하나의 유비(類比)
6. 인간 존엄성에 집중
V. 파스카 신비
7. 십자가와 부활에서 드러난 자비
8.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사랑은 죄보다 강하다
9. 자비로우신 어머니
VI. 대대로 자비를
10. 우리 세대의 모습
11. 불안의 원천
12. 정의로만 충분한가?
VII. 교회 사명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자비
13.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고백하고 그 자비를 선포한다
14. 교회는 자비를 실현하고자 힘쓴다
VIII. 현대 교회의 기도
15.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에 호소한다



I. 나를 보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요한 14,9 참조)

1. 자비에 대한 계시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Dives in Misericordia)”1)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로 계시하셨습니다.하느님을 드러내시고 우리에게 알려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의 친아드님이셨습니다.2)이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낸 순간은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인 필립보가 그리스도께 몸을 돌려 “주님,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간청한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3) 이 말씀은 파스카 만찬 끝에 있었던 고별 연설에서 하신 말씀입니다.뒤이어 일어난 며칠간의 거룩한 사건들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함께 다시 살려주셨다.”4)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증해 보이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따르고 현 시대에 특별히 필요한 것을 자세히 살펴본 끝에,저는 저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를 인간에 대한 진리에 바쳤습니다.이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완전하고 깊이 계시된 것입니다.이 중대하고도 험난한 시기에 이에 못지않은 또 하나의 중요한 필요성을 보고서저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 안에서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근원이 되시는 하느님”5)께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Gaudium et Spes)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새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주는 계시로써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고 인간이 높이 불리었음을 밝혀주십니다.”6)제가 인용한 이 구절은 인간이 - 관념상으로만이 아니라 온전한 실존적 차원에서 - 하느님과 결부되지 않으면 자기 본성의 완전한 존엄성을 드러낼 수 없다는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해 줍니다.그리고 인간과 그의 고귀한 소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부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주는 계시를 통해서 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신비를 묵상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매우 적절합니다.이것은 교회의 여러 경험과 현대인의 다양한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필요한 것이요,수많은 인간들 마음의 호소, 고통과 희망, 그들의 불안과 희망으로 보아 당연히 요구되는 것입니다.저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말했듯이 인간 개개인은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할 길입니다.그러나 동시에 복음서와 성전(聖傳) 전체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듯이,우리는 개개인과 더불어 이 길을 따라 걸으면서도,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통하여 성부와 그분의 사랑을계시하시면서7)걸으셨던 발자취를 따라서 걸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인간에게 이르는 모든 길은 곧 성부와 그분의 사랑에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변천하는 시대 안에서 오래도록 교회에 지정되어 있는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현대인에게 이 진리를 다시 확인시켰던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이 인간을 중심으로 삼을수록,다시 말해서 더욱 인간 본위가 될수록 그 사명은 하느님 본위로 강화되고 실현될 것입니다.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께 향하는 사명이 될 것입니다.과거에 인간의 여러 사조(思潮)는 신본사상(theocentrism)과 인본사상(anthropocentrism)을 분리시키고 심지어는 두 사상을 대립시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그리고 지금도 같은 상황입니다.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깊숙이 그리고 유기적으로 이 두 가지를 인간 역사 안에 결합시키고자 합니다.이 작업은 이 공의회의 근본 원칙 가운데 하나이며 가장 중요한 원칙이기도 합니다.그러므로 교회사의 현시점에서 우리는, 이 위대한 공의회 교리의 시행을 첫째가는 과업으로 삼고,믿음과 열린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다하여 이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위에서 언급한 회칙에서 저는 공의회에서 비롯된 교회의식이 깊어지고 여러 각도로 풍부해진 결과,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그리스도께 더욱 폭넓게 열렸음을 제시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세상의 구원자로서“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그리스도께 마음을 여는 이 개방이 완전히 성취되려면 언제나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성부와그분의 사랑에 결속되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2. 자비의 강생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지만”8) 삼라만상을 통하여 인간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보이시어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9) 보이는 세계의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을찾는 이 간접적이고 불완전한 인간의 오성(悟性)으로는 ‘아버지를 뵙기’에 부족합니다.성 요한도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드님께서 ……,하느님을 알려주셨다.”10)는 진리를 강조하는 말입니다.그리스도께서는 이 ‘알려주심’으로 하느님을 그분의 본질의 가장 깊은 신비까지 계시해 주십니다.한 분이시고 삼위이시며, “가까이 갈 수 없는 빛”11)에 둘러싸여 계시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심’으로써 우리가 알게 된 하느님은 그분께서 인간을 위하시는 사랑의 관계,그분의 “인간애호(philanthropy)”12)에 비추어서 아는 하느님이십니다.여기에서 ‘그분의 보이지 않는 본성’이 특수한 모습으로 ‘보이게’ 됩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잘 보이게 됩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이게 됩니다.그분의 행적과 말씀을 통하여, 끝으로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말미암아 각별히 잘 보이게 되십니다.다시 말해서 구약성서가 여러 개념과 어휘로써 ‘자비’라고 이미 정의한 바 있는 하느님의 속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입니다.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구약성서의 전승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십니다.그분께서는 비유와 비교로 자비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설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당신께서 몸소 자비를 인간이 되게 하시고인격화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 자신이 곧 자비이십니다.그리스도에게서 자비를 보고 그리스도에게서 자비를 발견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보이는 분”으로 나타나시며,“한없이 자비로우신 ……”13) 아버지로 나타나십니다.
현대의 사고방식은 과거의 사고방식보다 훨씬 더 자비의 하느님에 대립되는 듯하며,자비라는 이념 자체를 생활에서 배제하고 인간 마음에서 제거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역사상 알려지지 않았던(알지 못하던) 과학과기술의 엄청난 발달로 땅의 주인이 되고 땅을 굴복시켜 다스리게 된14) 인간에게는 “자비”라는 말과 개념이 매우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땅에 대한 이 지배를 흔히 일방적이고 피상적으로알아들음으로써 거기에는 자비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서론에 묘사된 현대 세계의 인간 상태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거기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이렇게 보면 현대 세계는 강하면서도 약하고,최대의 선을 다할 수도 있고 최대의 악을 저지를 수도 있으며, 자유와 예속, 진보와 퇴보, 사랑과 증오의 문이 동시에 열려있습니다.그러나 인간이 발굴한 힘들이 인간을 괴롭힐 수도 있고 인간에게 봉사할 수도 있으므로이런 힘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인간 자신의 책임임을 스스로 자각하게 됩니다.”15)
현대 세계는 지상의 인간에게 더 나은 미래라는희망의 터전이 되는 변혁을 일으키고 있고, 동시에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을 훨씬 초월하는 여러 가지 위협도 노출시키고 있습니다.교회는 여러 기회에(국제연합 총회,유네스코 회의,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와 기타 기구에서 한 연설들에서) 이 위협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지적한 바 있지만,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께 받은 진리의 빛으로 이 위협들을 검토해야 합니다.
“인자하신 아버지”16) 하느님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진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인간과 각별히 가까운 분으로 ‘보게’ 하며,특히 인간이 고통을 당할 때와, 인간의 존재와 존엄성이 위협을 당할 때에 하느님을 가까운 분으로 보게 합니다.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산 신앙의 정신으로 움직이는 많은 인간들과 집단들이 교회와 현대 세계의 상황을 보고거의 자발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그들은 바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인간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렇게 하도록 충동을 받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왜냐하면 인간에게 닥치고 있는 현대의 위협들로 미루어 볼 때에,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인자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신비야말로 교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유일한 호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본 회칙에서 저는 이 호소를 받아들이고자 합니다.저는 영원하고도 동시에 그 단순함과 깊이에서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계시와 신앙의 언어를 이끌어내고자 합니다.바로 이 언어를 통해서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인류 앞에서 이 시대의 커다란 불안들을 표현해 보려는 것입니다.
사실 계시와 신앙은 우리에게 ‘인자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신비를추상적으로 묵상하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 자비에 하소연하라고 가르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17)우리 아버지께서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당신께 하소 연하기를 늘 기다리고 계시며, 우리가 당신의 신비,성부와 그 사랑의 신비를18) 깊이 탐구하기를 늘 기다리신다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이러한 고찰이 누구나 이 신비를 더욱 가까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아울러 이러한 고찰이 교회가 자비를 비는 진심어린 호소가 되기 바랍니다.이 자비는 인류와 현대 세계가 너무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비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II. 메시아의 메시지

3. 그리스도께서 행적과 가르침을 시작하셨을 때에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주님의 성령께서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9)
루가복음서에 따르면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최초의 메시아 선언입니다. 이 선언에 뒤이어 이미 복음서를 통하여 알려진 행적과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행적과 말씀으로 사람들 가운데 아버지를 모셔오십니다. 그런데 그때 모인 사람들이 특히 가난한 사람들, 생계 수단이 없는 사람들,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 창조계의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는 눈먼 사람들, 마음이 상한 사람들, 또는 사회 불의로 고통받는 사람들, 그리고 죄인들이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 깊습니다. 메시아께서는 특히 이 죄인들을 위해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보여주시는 분명한 표지, 아버지를 보여주시는 표지가 되셨습니다.
이 보이는 표지 때문에 우리도 그 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뵈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사람들을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20) 하고 묻게 하였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설교를 시작하실 때 쓰셨던 같은 증언을 인용하셨습니다. 이것도 뜻깊은 일입니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그리고 다음 구절로 말씀을 맺으셨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21)
예수님께서는 특히 당신의 생활양식과 행적을 통해서 사랑이 세상에 와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힘있는 사랑, 인간에게 직접 말을 건네고 그의 인간성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다 포용하는 사랑이 와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과 불의와 빈곤에 접했을 때, 인간의 물리적 도덕적 한계와 취약성을 여러 가지로 드러내 주는 역사적 ‘인간 조건’, 전체에 접했을 때입니다. 이 사랑이 자체를 드러내는 모습 또는 영역을 가리켜 성서상의 용어로 ‘자비’라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 요한이 첫째 서간에서 표현한 대로, ‘사랑’이신 하느님이십니다.22) 또 그리스도께서는 앞서 인용한 바오로의 서간대로, 하느님을 “한없이 자비로우신”23) 분으로 계시하십니다. 이 진리는 단지 가르침으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와있는 실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자아의식으로 본다면, 아버지를 사랑과 자비 그 자체로서 현존하시게 해드리는 일이 메시아 사명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나자렛 회당에서 최초로 하신 말씀으로 확인되었고, 나중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와 당신 제자들 앞에서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아버지이시며 사랑이시며 자비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이런 방식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설교 주제 가운데 하나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시던 대로 먼저 ‘비유’로 자비를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는 사물의 핵심을 더 잘 표현하는 까닭입니다. 잃었던 아들의 비유24)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25)가 있으며, 대조적인 내용으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6)도 꼽을 만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는 새로운 각도로 ‘자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아주 많습니다. 잃은 양을 찾으러 가는 착한 목자27)라든가 잃었던 은전 한 닢을 찾아 집 안을 온통 쓰는 여자28)등이 그 예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 이 주제를 각별히 많이 다루는 복음사가는 루가입니다. 루가복음서는 ‘자비의 복음서’라는 명칭을 얻었을 정도입니다.
설교에 대해 논할 때 용어의 의미와 개념의 내용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데, 특히 자비의 개념의 내용(그리고 ‘사랑’의 개념과 갖는 관계)이 그렇습니다. 이 개념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자비의 실재 내용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용어의 의미와 “자비”라는 개념의 고유한 내용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다음 한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자비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시면서 사람들도 사랑과 자비에 따라 살도록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요구는 메시아의 메시지의 본질을 이루며, 복음 정신(ethos)의 핵심을 구성합니다. 스승께서는 이것을 두 가지로 표현하셨는데, 하나는 당신께서 “가장 크다”고 하신 계명을 통해서이고, 29)또 하나는 산상 설교에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30)라고 선포하신 축복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비에 대한 메시아의 메시지는 특이하게 신적이며, 인간적인 차원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아 예언의 성취 그 자체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이 되셨고, 고통받는 사람들, 불운한 사람들, 죄인들에게 그 큰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아버지이시요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현존하시게 만드셨고 더 완전하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타인을 위하는 자비로운 사랑의 귀감이 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말씀보다는 행동으로 자비를 호소하신 것입니다. 자비는 과연 복음 정신의 본질적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그것은 어떤 계명의 준수나 도덕적 성격을 띤 의무를 다하는 문제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 자비를 입을 것이다.”는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자비로우신 분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게 만드는 요건을 갖추는 길이기도 합니다.



III. 구약성서

4. 자비의 개념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자비’의 개념은 오래고도 풍부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자비를 더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행적과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비를 계시하실 때에, 그분께서 대하시던 사람들은 자비의 개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구약의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유구한 역사에서 하느님 자비에 관한 각별한 체험을 이끌어낼 줄 알았습니다. 이 체험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동시에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었지만, 이 백성은 그 계약을 여러 번 깨뜨렸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그들의 불성실을 깨우쳐주는 예언자들과 그 밖의 인물들이 있었으며, 따라서 백성은 스스로 불성실을 자각할 때마다 하느님의 자비에 호소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구약성서가 참으로 많은 사례를 제공해 줍니다. 중대한 사건들과 성서 본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대목을 들 수 있습니다. 판관(判官) 역사의 첫머리,31) 성전 봉헌 때에 바친 솔로몬의 기도,32) 미가의 예언 활동의 일부,33) 이사야가 제시한 위로에 대한 약속,34) 유배지에서 유다인들이 울부짖은 호소,35) 유배지에서 돌아온 뒤의 계약 갱신36)…….
예언자들은 설교 중에 백성의 죄 때문에 자비를 자주 언급했는데, 그 자비를 하느님 편에서 보여주시는 사랑의 이미지와 날카롭게 연결시켰습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남편의 사랑과 매우 흡사하게,37) 특별히 선택하신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고 심지어 배반과 부정(不貞)까지도 용서하십니다. 당신 백성에게서 후회와 진정한 회개를 보시면 은총으로 다시 이끌어주십니다.38) 예언자들의 설교에서 자비란 선택된 백성의 죄와 불신앙을 덮어주는 사랑의 특유한 힘을 뜻합니다.
이처럼 범위가 넓은 ‘사회적’ 맥락에서 자비는 개인의 내적 체험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죄의 상태에서 괴로워하는 인간, 온갖 고통과 불행을 겪는 인간의 내면 체험과 연결됩니다. 물리적 악과 윤리적 악 곧 죄는 둘 다 이스라엘의 아들딸들을 주님께 돌아서서 그분의 자비를 빌게 만듭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의 죄가 무거움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39) 욥도 한참 반항을 한 끝에 자신의 엄청난 불운 속에서 주님께 향했습니다.40) 에스델 역시 자기 겨레에게 닥친 전멸의 위협을 알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41) 구약성서에서는 그 밖의 예화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42)
이 다각적인 신념, 집단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신념, 세기를 두고 구약 전편에서 엿볼 수 있는 신념의 바탕에는 출애굽 때에 겪은 선민(選民) 체험이 깔려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노예로 전락한 당신 백성의 환난을 보셨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셨으며, 그들의 고통을 아시어 그들을 해방시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43) 주님의 이 구원 행위에서 예언자들은 그분의 사랑과 동정심을 깨달았습니다.44) 백성과 각개인이 하느님의 자비를 분명히 믿게 된 근거가 여기에 있으며, 그래서 비극이 덮쳐올 때마다 그 자비를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죄가 인간의 비참을 이룬다는 사실도 들 수 있습니다. 구약의 백성은 출애굽 때에 황금 송아지를 만듦으로써 이 비참을 느꼈습니다. 주님께서는 백성이 계약을 깨뜨렸을 때에도 스스로 이겨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45)라고 엄숙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이 핵심적인 계시로, 선택된 백성과 각개인은 죄를 지을 때마다 주님께 돌아갈 힘과 용기를 얻었으며, 주님께서 일찍이 당신을 두고 계시하신 바를 주님께 상기시켜 드리면서46) 그분의 용서를 빌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몸소 한 백성을 택하신 때부터 행위와 말씀으로 당신의 자비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 백성은 불행에 짓눌릴 때마다, 자신의 죄를 깨달을 때마다 끊임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의탁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께 속한 그 백성에게 쏟으신 주님의 자비에서 사랑의 절묘한 면모가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아버지47)이시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맏아들48)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이스라엘의 신랑이셨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예언자들은 ‘루하마(Ruhamah)’ 곧 ‘귀염둥이’ 또는 ‘연민을 받아온 여자’라는 새 이름49)을 붙여주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거듭되는 부정(不貞)에 환멸을 느끼시고 손을 끊기로 하셨다가도 당신의 분노를 이겨내신 것은 당신께 속한 그 백성에게 기울어지는 애정과 어지신 자비 때문이었습니다.50)따라서 시편 작가들이 주님께 최고의 찬미를 바치고자 할 때마다 사랑과 애정, 자비와 성실로 하느님께 찬미가를 바친 것은 당연합니다.51)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보면 자비는 하느님의 개념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그 아들딸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특색을 부여하는 것이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자비는 그들이 주님과 맺은 친밀을 나타내는 핵심이며, 그들이 주님과 나누는 대화의 핵심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구약의 각 성서에 자비가 참으로 풍부한 표현을 담고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들 성서에서 자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순수하고 이론적인 해답을 찾아내기는 힘들지만 거기에 쓰이는 용어들은 이 질문에 대해 무엇인가 말해 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52)
구약성서는 의미가 비슷한 여러 단어를 써서 주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고유한 의미들은 각기 다르지만 그 단어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방향에서 단일한 근본 내용에 집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없이 풍부한 내용을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다른 측면에서 그 내용을 인간과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구약성서는 불행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특히 죄악에 짓눌린 사람들, 그리고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전체에게 자비에 호소하고 그 자비에 의지할 수 있게 합니다. 성서는 실패의 순간과 믿음을 잃은 시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상기시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백성의 역사와 개개인의 생활에 그 자비가 드러날 때마다 그 자비에 대해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어느 의미에서 자비가 하느님의 정의와 대조되기도 하고, 여러 경우에는 자비가 정의보다 더 강할 뿐 아니라 더 깊은 것으로 나타나기까지 하였습니다. 구약성서도 정의가 인간에게는 본연의 덕목이며 하느님께는 초월적 속성이기는 하지만 사랑이 정의보다 ‘더 크다’고 가르칩니다. 사랑이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더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정의를 좌우하고, 궁극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정의가 사랑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정의에 대한 사랑의 수위권(首位權)과 우선권 - 이것이 계시 전체의 표지입니다 - 은 자비를 통해서 명확하게 계시되었습니다. 시편 작가들과 예언자들에게는 이것이 무척 분명하였기 때문에 ‘정의’라는 단어 자체가 주님과 그분의 자비가 이룩하신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정도였습니다.53) 자비는 정의와 구별되지만 정의와 상반되지 않습니다. 구약성서가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인간 역사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인정한다면 이 사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로서 각별한 사랑으로 당신 피조물과 결속하여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그 본질상 한번 자기를 바친 대상에게 증오와 악의를 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만드신 그 어느것도 미워하시지 않는다.”54)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인간과 세계를 상대로 하시는 정의와 자비의 관계, 그 본바탕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에게, ‘태초로’, 창조의 신비 자체로 거슬러 올라가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이 관계, 생명을 주는 뿌리와 이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근거를 찾아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옛 계약을 배경으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완전하게 계시되리라는 예고가 됩니다.55)
창조의 신비와 연결되어 선택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선택의 신비는 믿음의 덕으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는 백성의 역사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통틀어 이 백성을 통한 선택의 신비는 남녀 모든 인간, 인류 대가족 전체에 미치는 것입니다. “나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여 너에게 변함없는 자비를 베풀었다.”56)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이 무너져도 나의 사랑은 결코 너를 떠나지 않는다. 내가 주는 평화의 계약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57) 이 진리는 이스라엘에게 일단 선포됨으로써 인류 역사 전체의 전망이 되었습니다. 현세적이고도 종말론적인 전망이 되었습니다.58)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전망에 비추어서, 구약성서의 무수한 구절에 나와 있고 이미 바탕이 닦인 토대에서 아버지를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당신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그 계시를 끝맺는 자리에서, 그분께서는 필립보 사도에게 잊혀지지 않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59)



IV. 탕자(蕩子)의 비유

5. 하나의 유비(類比)

신약성서 첫머리 루가복음에 구약 전체의 전승을 강렬하게 반영하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하여 독특한 조화를 이루는 두 표현이 나오는데, 이들은 각각 구약의 다른 용어와 연결되는 어의적(語義的) 요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즈가리야의 집에 들어가시면서 ‘주님의 자비’에 대해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대대로’ 자비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바로 뒤에 마리아께서는 이스라엘의 선택을 되새기시면서, 마리아를 선택하신 그 자비가 주님께서 영원토록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신’ 것이라고 공언하십니다.60) 얼마 뒤에 같은 집에서 세례자 요한이 출생하자 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미하고 영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자비를 베푸시며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61)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는 구약성서로부터 내려오는 이 전승이 더 단순해지고 더 깊어집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집니다.62) 이 비유에는 ‘자비’라는 말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참으로 명백하게 하느님의 자비의 진수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성서들처럼 용어 덕분이라기보다는 자비의 신비를 더 완전히 알 수 있게 하는 유비(類比) 덕분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방탕과 죄악 사이에 빚어지는 심각한 극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그 진수가 표현되는 것입니다.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아버지에게서 받은 아들은 먼 고장으로 떠나가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재산을 마구 뿌립니다. 어느 의미에서 이 아들은 은총과 원초적 정의를 상실한 첫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유비는 대단히 폭이 넓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간접적으로 사랑의 계약에 대한 각각의 파기, 은총의 상실, 죄 하나하나에 두루 해당됩니다. 탕자의 유비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불성실에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예언자 전승만큼 백성의 불성실에 크게 역점을 두지는 않습니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그 아들은 “알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찾아갔던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그는 아무것으로라도 “배를 채워보려고 했고”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 더부살이를 하면서 자기가 치던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그는 거절당했습니다.
유비는 드디어 인간의 내면으로 초점을 돌립니다.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서 유산으로 받은 재물은 막대했지만, 그 재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집에서 누리던 아들로서의 품위였습니다. 재물을 잃은 처지에서 그는 그 품위도 잃었음을 깨닫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라고 말하는 투로 보아 지금 와서도 자기의 품위를 의식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는 자기가 잃어버린 재물, 지금은 ‘소유’하고 있지 못한 재물, 그러나 아버지의 집에 있는 일꾼들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가 한 말이 재물에 대한 그의 태도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말 뒤에는 품위를 잃은 비애, 아들의 실추된 신분에 대한 각성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결단을 내립니다.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63) 이 구절은 근본 문제를 더 깊숙이 드러내 보이는 말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 때문에 탕자가 처한 복잡한 물질적 상황은 그에게 품위를 상실했다는 느낌이 들게 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아들의 자격이 아니고 품꾼으로 써달라고 청하기로 결심한 일이 얼른 보기에는 자기가 처한 굶주림과 가난 때문에 한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동기에는 깊은 상실감이 깃들여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집에 품꾼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커다란 수치요 굴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탕자는 그 수치와 굴욕을 감수할 각오가 서있었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집에 품꾼으로 들어가는 길말고는 더 이상 다른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의 결심은 정의에 입각해서 과거에 자기가 응당 받아야 할 바가 무엇이었고 지금 자기가 얻을 수 있는 자격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의식한 데서 내려진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추론을 통해, 탕자의 의식 한가운데에는 자기가 상실한 품위에 대한 깨달음이 새삼 솟아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맺는 혈연에서 오는 그 품위에 대한 깨달음이 새삼 솟구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결심에 힘입어 그는 떨치고 일어섰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정의’라는 단어는 한 번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원본에 ‘자비’라는 단어가 한 번도 안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정의와 사랑의 관계, 자비로 나타나는 그 관계가 복음서의 비유 내용에 참으로 정확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정의의 엄밀한 규범, 엄밀하고 흔히 너무도 편협한 규범을 능가해야 할 필요가 생겼을 때에 사랑이 자비로 변모되었음이 분명합니다. 탕자도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을 날려보냈지만, 집으로 돌아온다면 아버지의 집에 품꾼으로라도 들어가 생계를 이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또 잘만 되면, 비록 자기가 탕진한 재산에는 절대 못 미치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모아 상당한 재산을 이룰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의에 입각한 요청입니다. 아들로서 그는 자기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탕진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또한 그 행동으로 아버지를 상심시키고 괴롭혔던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 그런 행실이 아들로서의 자격을 빼앗아 갔으며, 따라서 그 행실이 아버지에게 무관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괴롭혔음에 틀림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에게 누를 끼쳤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탕자는 자기의 아들이며, 이 부자 사이의 관계는 어떤 행동 때문에 달라지거나 끊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탕자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 사실이었고, 이 깨달음이 자기가 잃어버린 품위를 똑똑히 보게 만들었으며, 자기가 아직도 아버지의 집에서 차지할 만한 자리가 무엇인지 솔직히 따져보게 만들었습니다.

6. 인간 존엄성에 집중

탕자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이러한 정확한 묘사는 하느님의 자비가 무엇에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게 합니다. 이 단순하고도 뜻깊은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보여줌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행동과 그의 모든 처신은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속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무척 새롭고도 참으로 단순하고 깊이있게, 구약의 자비 사상을 세밀한 부분까지 보여줍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아버지 된 도리에 성실합니다. 늘 아들에게 쏟아오던 그 사랑에 끝까지 성실합니다. 이 성실함이 이 비유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들이 유산을 다 날려버리고 돌아오는데도 서슴없이 집 안에 맞아들이는 행동만이 아닙니다. 탕자가 돌아온 것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잔치를 벌입니다. 그 잔치가 하도 푸짐한 것이어서, 여태까지 한 번도 아버지의 곁을 멀리 떠나거나 집에서 뛰쳐나간 일이 없던 큰아들의 반발과 미움까지 삽니다.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성실함 - 구약의 용어 헤세드(hesed)로 알려진 특성 - 은 정(情)을 보이는 모습에서도 나타납니다. 우리가 읽은 바에 따르면,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보고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64) 아버지는 깊은 정에서 우러나 이렇게 행동했음에 틀림없으며 이것은 아들에게 기우는 그의 어진 성품을 나타냅니다. 그 어진 성품이 큰아들을 몹시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애정의 이유는 더욱 깊은 차원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는 근본적인 선(善), 곧 자기 아들의 인간성의 선함이 살아남았음을 간파하였던 것입니다. 아들이 비록 재산을 날렸지만 그의 인간성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어느 면에서 그 인간성을 다시 찾은 셈입니다.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한 말에 그 점이 잘 나타납니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65) 같은 루가복음 15장에는 잃었던 양 한 마리의 비유가 나오고,66) 잃었던 은전의 비유도 나옵니다.67) 그리고 그 두 비유에서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그 ‘기쁨’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성실함은 잃었던 아들의 인간성, 그의 존엄성에 온전히 집중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아들이 돌아온 순간에 아버지가 보였던 기쁜 감정을 설명해 줍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아들에 대한 사랑, 부성(父性)의 본질에서 솟아나는 사랑이 어느 면에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존엄성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 배려가 바로 아버지 사랑의 척도이며, 이 사랑을 두고 성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노래하셨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그리고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68) 그리스도께서 탕자의 비유에서 보여주신 자비는 신약성서에서 아가페(agape)라고 부르는 사랑의 내면적 형태입니다. 이 사랑은 모든 탕자에게 미칠 수 있고, 비참한 모든 인간에게 미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온갖 형태의 윤리적 비참, 곧 죄에 미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미칠 때에 자비의 대상이 된 사람은 모멸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시 찾았고 ‘가치를 되찾았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아버지는 제일 먼저 그에게 반가움을 나타냅니다. ‘잃었다가 다시 찾고’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을 보는 기쁨을 나타냅니다. 이 기쁨은 선(善)이 그 아들에게 본래대로 남아있음을 가리킵니다. 비록 방탕한 사람이었지만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친아들임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이 기쁨은 다시 찾게 된 선(善)이 있음도 가리킵니다. 방탕한 아들의 경우,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진리로 되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유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외면상으로’ 일어난 것으로 평가하면 안됩니다. 자비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은 거의 외면상으로만 당사자들을 평가하는 데서 옵니다. 그 때문에 일반적으로 자비라고 하면 자비를 베푸는 사람과 자비를 받는 사람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가 그것을 받는 사람을 낮추게 만들며 따라서 인간 존엄성이 손상된다고 섣불리 생각합니다. 그러나 탕자의 비유는 사실이 이와 다름을 보여줍니다. 자비의 관계도 인간이라는 선한 존재의 공통된 체험에 바탕을 두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존엄성, 그것에 대한 공통된 체험에 바탕을 두는 것입니다. 이 공통된 체험 때문에 탕자는 자기 자신과 자기 행동의 참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진실로 이 안목은 하나의 순수한 겸손입니다). 또 한편,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탕자는 자기 아버지 눈에 참으로 귀한 선(善)으로 비쳐진 것입니다. 아버지는 진리와 사랑에서 오는 신비스러운 비추임 덕택에 아들에게서 일어난 선(善)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저지른 모든 악행을 잊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회개의 실재를 단순하고도 깊이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인간 세계에서 사랑의 작용과 자비의 출현을 보여주는 제일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제아무리 시선이 깊고 동정에 가득 찬 것이라 할지라도 윤리적, 물리적 또는 물질적 악(惡)을 기만하는 데에 자비의 참뜻이 있지는 않습니다. 세계와 인간에게 존재하는 온갖 형태의 악(惡)으로부터 자비가 선(善)을 이끌어내고 선을 촉진하고 회복시켜 줄 때에, 자비는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자비야말로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메시지의 근본 내용을 이루며, 그리스도 사명의 본질적 능력을 이룹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추종자들도 자비를 똑같이 이해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과 행실에서는 언제나 자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악에 굴복하지 않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려는”69) 사랑, 이 사랑의 증거로서 그들은 언제나 자비를 보여주었습니다. 자비의 본모습은 늘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선입견이 있겠지만 우리 시대야말로 자비를 특별히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V. 파스카 신비

7. 십자가와 부활에서 드러난 자비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메시지와 사람들 가운데서 행하신 활동은 십자가와 부활로 끝났습니다. 이 최종 사건을 공의회 용어로는 파스카 신비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구원 역사에 깊숙이 계시된 그대로, 자비에 대한 진리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이 최종 사건을 깊이 파악해야만 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를 다시 가까이에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구속(救贖)의 내용이 과연 ‘인간적 차원’에서, 그처럼 위대한 구세를 얻게 된(qui talem ac tantum meruit habere Redemptorem),70) 인간의 놀라운 위대함을 계시해 준다면, 동시에 구속의 신적 차원은 저 위대한 사랑의 깊이를 우리에게 가장 체험적이고 ‘역사적인’ 방식으로 계시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속의 신적 차원은,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만드셨고 당신 친아드님 안에서 은총과 영광을 받기로 ‘태초부터’ 뽑힌 인간들을 향하여 창조주인 아버지로서 당신의 성실함을 다하시고자 당신 아드님의 엄청난 희생까지도 주저하지 않으신 그 사랑을 감지할 수 있게 합니다.
성금요일의 사건들, 아니 그보다 앞서 게쎄마니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명에서 사랑과 자비를 계시하던 과정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고쳐주시고”71)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시던”72)분께서 이제는 가장 큰 자비를 입어야 할 분이 되시고 자비를 호소하는 처지가 되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체포되고 모욕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고 채찍질을 당하고 가시관을 쓰실 때에, 십자가에 못박히고 고통 중에 몸부림치며 돌아가실 때에,73) 그분께서는 자비를 호소하신 것입니다. 그때야말로 당신께서 이제껏 선을 베푸신 사람들에게서 자비를 입으실 만한 때였지만 결국 그분께서는 자비를 입지 못하셨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그분을 보호해 드리지 못하고 압제자들의 손에서 그분을 빼내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의 메시아 활동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예언자들이 한 말, 특별히 이사야가 주님의 종을 두고 한 다음 말이 그리스도께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구나!”74)
참으로 고통받는 인간, 올리브 동산과 갈바리아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설교해 오셨고, 당신의 모든 활동을 통해서 아버지의 자비를 증언하고자 세상에 태어나시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그분께서는 - 그분조차도 -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처절한 고통을 면하시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다.”75)는 성 바오로의 말씀은 심오한 의미를, 동시에 구속 실재의 신적 차원을 단 몇 마디로 간추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속이 바로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계시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완전성이 충만한 분이시며, 정의와 사랑으로 가득 찬 분이십니다. 정의는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고 사랑에서 흘러 나오고 사랑을 향하여 나아가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서, 아버지께서 당신 친아드님의 목숨을 살려주시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다.”76)는 사실은 절대정의(絶對正義)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 때문에 수난과 십자가형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정의가 ‘흘러 넘친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신인(神人)의 희생으로 인간의 죄가 ‘보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정의, 참으로 ‘하느님의 척도에 맞는’ 이 정의는 전적으로 사랑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사랑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사랑 안에서 결실을 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신적 정의가 ‘하느님의 척도에 맞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정의가 사랑에서 우러나고 사랑 안에서 성취되고 구원의 열매를 맺는 까닭입니다. 구속의 신적 차원은 죄 위에 정의를 부과함으로써만 효험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창조적 능력을 사랑으로 회복시켜 줌으로써도 실효를 거둡니다. 그 덕분에 인간은 다시 한번 하느님에게서 오는 충만한 생명과 거룩함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속은 자비를 충만하게 계시하는 것입니다.
파스카 신비는 이처럼 자비가 계시되고 효험을 내는 절정입니다. 파스카 신비는 인간을 의화(義化)시킬 능력이 있으며,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인간에게, 또 인간을 통해서 세상에 바라시던 구원질서에 정의를 회복시킬 능력이 있습니다. 고통받는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신앙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각별히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비신자도 그분에게서 대다수 인류와 운명을 함께하는 연대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을 위한, 또 진리와 사랑에 바친 사욕없는 헌신이 그분에게서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파스카 신비의 신적 차원은 이보다 훨씬 깊어집니다. 갈바리아에 세워진 십자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최후의 대화를 나누신 십자가는 사랑의 핵심에서 솟아오르는 십자가였습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서 선물로 받았던, 바로 그 사랑에서 우러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하느님께서는 창조주요 존재의 궁극적 원천으로서 세계와 긴밀한 연결을 맺는 데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버지도 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결속되어 계시며, 창조보다 더 친밀한 인연으로 인간을, 보이는 세계에 존재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선한 것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생명에 참여하는 특권까지 주시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자기를 내주고 싶어하는 까닭입니다.
갈바리아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감탄할 거래(admirabile commercium)가 이루어지는 길,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놀라운 자기통교(自己通交)를 해주시는 길 옆에 서있습니다. 이 거래와 통교에는 인간에게 건네시는 부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바치고 더불어 눈에 보이는 세계 전체를 바침으로써 신적 생명을 나누어 누리라는 부름입니다. 양자(養子)가 되어, 하느님께 있고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와 사랑을 나누라는 부름입니다. 역사상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는 곳은 인간이 하느님의 양자라는 존엄한 품위로 영원한 선택을 받는 길 옆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 “빛에서 나신 빛이시요,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77)으로서,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놀라운 계약, 하느님께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과 맺으시는 계약을 최종적으로 증언하려고 오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길 옆에 서있습니다. 이 계약은 인류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서 창조의 신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뒤로 또 하나의 선민(選民)과 하느님 사이에 여러 차례 갱신되었습니다. 갈바리아에서 체결된 대로 새롭고도 완결된 이 계약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백성에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개방된 계약입니다.
그 밖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십자가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메시지와 사명의 마지막 말씀이라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 주겠습니까? 그럼에도 그 십자가는 아직 계약의 하느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여인 몇 명이, 그뒤에 사도들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아가는 새벽에야 울려퍼질 것입니다. 그들은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고 최초로 “그는 살아나셨다.”는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그들은 이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들려주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도 십자가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 위에서 고난을 받고 돌아가신 분, 사람이신 성자께서 메시아로서 남기신 증언을 통해서 십자가는 여전히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에게 기우는 당신의 영원하신 사랑에 절대적으로 충실하신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결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 따라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습니다.”78) 십자가에 달리신 아들을 믿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79) 것입니다. 사랑이 세상에 와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개인과 인류 또는 세계가 연루되는 모든 악보다 강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믿는 것은 자비를 믿는 것입니다. 자비는 사랑 가운데 꼭 있어야 할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자비는 사랑의 별명입니다. 악이 세상에 있고 인간을 좌우하고 사로잡으며 인간 마음속에 스며들어가 인간을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80) 수 있는데, 바로 이 악의 실재 앞에서 사랑이 자태를 드러내고 효력을 미치는 특수한 양상이 곧 자비입니다.

8.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사랑은 죄보다 강하다

갈바리아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의 위력이 하느님의 아들에게까지 미쳤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아들들 가운데에서 본성상 홀로 절대 죄없으시고 죄에서 자유로웠던 분, 이 세상에 오시면서도 아담의 불순종과 원죄의 유산에서 때묻지 않았던 분에게까지 악이 얼마나 맹위를 떨쳤는지 그 위력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분 그리스도에게서 죄에 대한 정의(正義)가 구현되었습니다. 그분의 희생을 대가로, “죽기까지” 한 그 순종을 대가로81) 죄에 대한 정의가 실현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죄가 없으셨는데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습니다.”82) 또한 죽음, 인류 역사 시초부터 죄와 결부되어 내려온 죽음에도 정의가 구현되었습니다. 죄가 없는 분, 홀로 돌아가심으로써 죽음을 죽이실 수 있었던 분83)의 죽음을 대가로 해서 죽음은 응분의 정의를 받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버지와 본질이 같으신 아들이 하느님께 온전한 정의를 이루어드린 곳이며, 동시에 자비가 철저히 계시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바로 인간 역사에서 악의 뿌리를 이루는 것, 곧 죄와 죽음에 항거하는 사랑의 계시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야말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처지로 내려오시고, 인간이 어렵고 괴로운 순간이면 자신의 불행한 운명이라고 한탄하는 그 경지까지 내려오신 가장 심오한 겸손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현세적 실존의 가장 쓰라린 상처에 영원한 사랑으로 와닿는 어루만짐이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나자렛 회당에서 공식적으로 표명하셨고84) 뒤에 세례자 요한이 보낸 사람들에게 다시 공표하신85) 메시아 계획의 완전한 성취인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말씀에 따르면86) 이 계획은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고 갇힌 사람들, 눈멀고 압제받고 죄많은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사랑’을 계시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파스카 신비에서 인간이 지상의 실존을 계속하는 한 반드시 나누어 겪게 되는 다변적인 악의 울타리가 무너졌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의 깊은 뿌리를 깨닫게 하였으니 악은 죄와 죽음에 그 뿌리를 박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종말론적 표지가 됩니다. 세계의 종말론적 완성과 결정적 쇄신이 올 때에야 비로소 사랑은 선택받은 사람들 속에서 악의 가장 깊은 원천을 완전히 섬멸하게 될 것이고, 그 완숙한 열매로써 생명과 거룩함과 영광스러운 불사불멸의 나라를 이룩할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 완성의 바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죽음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87)는 사실은 메시아적 사명의 최종 표지가 됩니다. 악에 예속된 세상에서 자비로운 사랑을 드러내 주는 계시 전체를 완결시키는 표지가 됩니다. 아울러 이 사실은 “새 하늘과 새 땅”88)을 예고하는 표지도 됩니다. 그날이 오면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입니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89)
종말론적 완성이 오면 자비는 드디어 사랑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현대적 과정, 인간의 역사는 또한 죄와 죽음의 역사이기 때문에 사랑이 자비로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고 또한 자비로서만 실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아 계획, 자비의 계획은 당신 백성이 물려받는 계획이 되었고 교회의 계획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비로운 사랑이 나타나는 계시가 절정을 이룬 곳이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것들이 다 사라져버릴 때까지”90) 십자가가 다른 모든 말씀의 지표가 될 것입니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도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91)라는 요한 묵시록의 말씀까지도 십자가를 지표로 해서 알아듣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를 특별한 양식으로 드러내시는 때가 있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분 안에서 자비를 받으라고 초대하실 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 다름아닌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서 - 사라지지 않는 ‘말씀’이십니다.92)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문 밖에 서서 각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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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느님의 자비에 관하여 복음화위원회 08.06.10 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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